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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2일 아침 오전 7시 40분, 4명의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평택 에바다농아원 사무동 앞에서 즐겁게 손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등에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책가방이 메여 있었다.

▲ 선생님과 학생들의 흥겨움
ⓒ 이철용
에바다학교 학생들인 이 아이들은 아침마다 학교 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아침 등교시간은 8시 20분, 40분이나 이른 시간에 등교를 준비하며 등교차량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에바다 사태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에바다학교의 농아학생들이었다. 구재단의 에바다농아원 점거는 에바다 학생들의 수업을 어렵게 했다. 그 와중에 30여명의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에바다 농아원과 해아래집으로 나뉘어서 수업을 진행했다.

에바다학교는 7년 전인 1998년 11월부터 교문을 폐쇄하고 재단에 반대하는 교사들의 출근을 저지했다. 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해아래집'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7년여간 주기적으로 에바다학교의 수업은 원활하지 못했다. 교장은 물론 재단의 반대 입장에 선 교사들은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난해 3월부터는 에바다학교가 완전히 둘로 갈라져 에바다농아원과 해아래집 두 곳으로 나뉘어 교사와 학생 모두가 이산의 아픔을 맛보았다.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올해 3월 경기교육청은 신입생을 에바다학교에 배정하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에바다학교는 조기 방학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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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 이어 학생들도 하나된 수업

▲ 이른 아침 등교를 기다리는 학생들과 권오일 교사
ⓒ 이철용
에바다학교는 지난 3월 농아원 내의 학교가 계속적인 점거와 폭력으로 인해 수업이 불가능해지자 에바다종합복지관의 협력으로 임시 학교를 복지관 내에 개설하고 교육청의 신입생 배정과 더불어 본격적인 수업을 진행했다.

모든 교직원들은 에바다종합복지관의 임시학교에 출근해 김지원 교장의 지시를 받아 수업을 진행했다. 둘로 나뉘었던 교사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해아래집을 중심한 농아원 바깥의 학생들이었다. 여전히 농아원 안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다.

5월 28일 에바다복지회 이사회의 에바다농아원 진입 이후 격한 대립을 벌이던 농아원은 6월 3일 경찰의 압수수색과 최성창 전 이사장을 비롯한 일부의 점거자 연행을 통해 정상화의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에바다농아원은 6월 7일 새벽 일부 농아들의 침탈로 인해 다시 혼미에 빠졌다. 이에 이사회는 농아원 기숙사에 거주하는 불법 거주자와 졸업생 등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 이외의 사람들을 농아원 외부로 퇴거시켰다.

에바다농아원 기숙사에는 초중학생들 9명만 남게 되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농아원을 떠났다. 이후 에바다농아원에는 평화의 기운이 감돌았다.

8일 일요일에는 농아원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 해아래집 아이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저녁 늦게까지 해아래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농아원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원수처럼 나뉘어 지내던 아이들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하나가 된 것이다.

"보모가 학교에 가면 기숙사에서 쫓아내겠다고 했어요"

▲ 교감 선생님과 함께
ⓒ 이철용
9일 월요일부터 기숙사의 아이들은 책가방을 챙겨 에바다종합복지관의 학교에서 진행되는 수업에 빠짐없이 전원 참석했다. 교사가 하나가 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학생들도 하나가 된 것이다. 누가 이 아이들을 갈라놓았는가?

6월 8일 에바다농아원에는 한국농아인협회 주신기 회장 일행이 방문했다. 주 회장 일행은 기숙사를 방문해 농아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주 회장은 학생들에게 "왜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했고 아이들은 "우리는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박아무개(구 재단측 보모) 선생이 학교에 가면 기숙사에서 쫓아내겠다고 해서 학교에 갈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렇듯 천진난만한 어린 농아 학생들은 특정인의 강압적인 위협으로 인해 학교에 갈 수 없었고 그들이 농아원을 떠나자 바로 등교를 했다.

12일 이른 아침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가기 위해 승합차를 몰고 온 사람은 권오일 선생이었다. 그렇게 권오일 선생에 대해 거부감을 강하게 나타냈던 현장을 목격했던 기자로서는 과연 아이들의 반응이 어떨까 걱정스러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걱정은 기우였다. 권 교사를 만난 아이들은 언제 불편한 일이 있었냐는 듯 서로 얼싸안고 즐거워한다. 한 아이는 기자 앞에서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40여분 구비구비 산길을 넘어 에바다종합복지관 임시학교로 가는 동안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마치 소풍을 가듯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에바다 사태의 최대 희생자는 농아학생들

▲ 에바다장애인종합복지관 내의 임시학교의 교무실
ⓒ 이철용
복지관의 교실에 들어서서도 아이들은 즐겁게 얼굴을 비비며 하나가 되어 즐거운 하루를 시작한다. 함께 공부를 시작한 지 사흘째 되지만 항상 함께 했던 것처럼 전혀 서먹함이나 낮선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에바다학교 교무실은 정상화를 위해 내딛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교무실의 한쪽 칸막이에서 만난 김지원 교장은 분주한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된 학교에 안도의 숨을 내쉰다.

김 교장은 "에바다종합복지관의 임시학교는 수업환경도 열악하고 복지관에 피해를 주기도 해 하루속히 농아원 내의 본래 학교로 옮기려 하지만 워낙 파손 상태가 심해서 앞으로 2-3주는 더 지나야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김 교장은 복구를 위한 비용도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복구에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긴급복구를 위해 경기교육청에 특별교부금을 신청하는 일 등 쉽지 않은 일들이 많다고 안타까운 하소연을 한다.

▲ 에바다학교 김지원 교장
ⓒ 이철용
김 교장도 제자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온 아이들이 반갑고 이쁘다고 한다.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워낙 에바다 사태가 극과 극을 달리기 때문에 어떤 일이 다시 벌어질지 불안하기만 하다고 한다.

김 교장은 혹시 아이들의 노출로 인해 위해를 당할까 하는 염려로 기자에게 아이들의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사진을 찍어달라고 특별 주문을 하기까지 했다.

에바다 학교 정상화를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움을 이끌었던 권오일 교사는 "에바다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농아학생들"이라며 "이렇게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억류한 어른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구재단 측의 사람들이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랑을 돌려줄 일만 남았다"고 했다.

교실에서 만난 아이들은 수화로 진행되는 수업에 손으로 "저요, 저요"를 연발하며 잠시도 가만 있질 않는다. 그 모습에는 나뉨이 없었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서 수업을 하는 농아원 기숙사에 거주하는 한 학생은 "오랜만에 함께 해서 너무 좋고 농아원에서는 친구도 적어 심심했는데 여러 친구들을 만나 기쁘다"고 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해아래집의 아이들은 "이제는 서로 미워하지 않아 좋다"고 했다.

한 교사는 "구 재단측 사람들이 기숙사를 나갈 때 고등학교 과정의 학생들이 함께 나가 수업을 못하고 있는데 하루 속히 그들도 학교로 돌아와 함께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법과 상식, 원칙으로 다시는 이런 아픔 없어야

ⓒ 이철용
7년간 에바다 사태의 최대의 희생자는 에바다학교의 학생들이다. 그러나 정작 에바다 사태를 바라보며 항상 이 아이들은 뒷전에 있었고 오히려 아이들이 볼모가 되기도 했다. 이제 에바다는 정상화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폭력과 비상식이 완전히 가시질 않고 있다. 경찰과 검찰도 성의를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는 약한 것 같다.

진정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헤아려야 할 것이다. 다시는 이 아이들이 불법적 사태로 인해 소중한 수업권을 박탈당하거나 법과 상식, 원칙이 무시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날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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