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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에서 필자는 2월 10일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으로 한반도가 중대한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국제 관행과는 달리 역설적으로 조용한 외교가 진행되고 있음을 분석했다.
또 필자는 북한핵문제는 기존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핵무기 개발이 아니라 핵에너지 개발 억제가 실제적인 쟁점이었으며 핵무기 개발은 부수적인 쟁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다. 그리고 이 쟁점은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 운용과 관련하여 석유와 우라늄 등 전략물자의 억제 및 확보(서방측으로의 편입)와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여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형상 조용하지만 중대 국면을 맞고 있는 한반도 상황에서 이러한 국면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한국외교가 처한 상황과 나아갈 방향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부시외교는 뜻하지 않은 북한의 대담한 조치에 외교 동력을 상실한 딜레마에 빠져있으며 한국 외교는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하나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 기회가 어떻게 조성되었고 또 어떻게 살려나가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퍼주기” 논란과 2인3각 한-미 간 외교게임
흔히들 이번의 놀라운 사태를 맞으며 보수적인 사람들은 한국 정부의 소위 ‘대북 퍼주기’가 북한핵무기 보유라는 뒤통수 치기를 초래했다고 매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물론 근거가 전혀 없는 잘못된 논리다.
한국은 건국 이후 미국과 깊은 혈맹 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미국이 허용하지 않는 대북퍼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따라서 퍼주기란 말 자체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한미관계는 운동회의 2인3각(二人三脚) 게임처럼 한발이 서로 묶인 것과 같은 상황이기에 미국의 의사를 벗어난 독자적 퍼주기 행위는 사실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의 태도, 특히 보수적인 미국의 입장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는 적성국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고 또 관용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측면이 많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북한에 다소 유화적인 햇볕정책을 한다고 해도 제한된 범위의 한정된 행보에 불과한 것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주장하는 퍼주기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인 것이다.
이번에 북한이 한 대담한 선택은 한국정부의 퍼주기가 원인이라기보다 부시행정부의 과도한 압박외교가 초래한 일이다. 한미 관계는 벗어나기 힘들게 한 다리가 서로 묶인 혈맹관계이지만 힘의 역학관계상 평등한 관계가 아니고 불평등한 혈맹관계이다. 이런 상황이기에 2인3각의 한미간 외교게임에서도 그러한 힘의 비대칭적인 불균형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다.
그래서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능하지만 한국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발걸음은 상당히 어렵고 제한적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부시행정부의 대북 매질외교는 거의 그대로 진행되었지만, 노무현정부의 온건한 평화번영정책은 미국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언제든 비틀거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부의 6자회담 노력도 결국은 미국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보수적인 부시행정부에서 협상을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대화는 해도 협상은 없다”는 강경한 대북 메시지가 나와도 우리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원하고 한국이 원하지 않는 이라크 파병은 혈맹관계에서 언제든 가능했지만 노무현 정부가 나름대로 의욕을 갖고 추진하는 화해평화번영 정책은 늘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전임 정부로부터 관행처럼 해오던 수준의 제한된 대북 지원과 교류협력을 가지고 “퍼주기”로 매도하며 이번 사태의 전적인 책임을 한국정부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논리다.
6자 회담과 갈지자 운명
6자회담은 애초부터 성공이 불확실한 회담이었다. 이 회담은 미국측의 요구로 시작된 것으로 북한은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방식의 회담이다. 다자간 회담은 외형상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통해 민주적인 형식을 보장하는 회의체지만, 관련 당사자가 많아지면 이해관계의 복잡성으로 합의도출이 어렵게 되는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회의에 많은 나라가 참여하게 되면 그것이 사실상 한반도에 대한 제도화된 간섭이 되고 또 차후 계속하여 국제적 관례로 남을 수 있기 때문에 자주성을 유달리 강조하는 북한 입장에서는 찬성할 수 없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힘에 눌려 북한도 마지못해 나온 회담이라 할 수 있다. 사실 94년도의 북-미간 제네바 합의의 전례를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북핵문제는 최종적으로는 북한과 미국이 합의만 하면 해결되는 사안이다. 북-미를 제외한 일본 중국 러시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합의에 참여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회의에 동참한 것은 소극적이지만 나름대로 성의를 보인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 가장 큰 힘을 갖고 주도적 역할을 하는 미국은 늘 “대화는 해도 협상은 하지 않는다”거나 “완전하고도, 검증가능하며, 되돌이킬 수 없는” 방식의 북한 핵프로그램 동결을 요구해왔다. 이것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북한 핵주권의 전면적이고 완전한 영구적 포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사실상 완전한 패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에 임하는 미국측의 성실성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 다자간 회담이라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미국만이 유일한 거부권(veto power)을 가진 비대칭적 힘의 균형관계를 가진 회의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지금 국제관계에서 어느 국가의 견제를 받지 않는 초강대국의 지위를 행사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이 원하면 언제든 회담이 유효하게 진행되지만 반대로 미국이 거부하면 회의는 사실상 그날로 효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성실성 혹은 의지가 회의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간 부시행정부의 강경 대응은 회담의 유효한 결실보다는 차후의 북한침공을 위한 결정적 명분 쌓기 혹은 시간벌기라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미국은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 ‘테러지원국’, ‘폭정의 전초’ 등으로 정의하며 선제공격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유포하며 이들의 생존을 압박해 왔으며
실제 이라크를 침공하여 체제를 붕괴시키기도 했다. 이어 지금은 이란을 적극적으로 압박하여 전쟁전야로 몰고가는 중이다.
이러한 과정은 공공연하고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북한으로 하여금 이란에 이은 제3의 이라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6자회담은 미국이 이라크에 이어 이란문제를 종결지은 다음 북한을 때릴 때를 대비하여 그때까지 명분을 축적하기 위한 것이란 의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실제 서방측 관측자들도 최근 부시행정부가 이란을 몰아세우는 과정은 이라크 침공 전과 섬뜩할 정도로 흡사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6자회담은 미국이 북한에게 납득할 수 있는 성의를 보여주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는 회의였으며, 그동안 미국은 북한에 대해 성의를 보여주었다고 보기 힘들다. 결국 6자회담은 갈지자 행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북한은 주요 당사자로 회의에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인 것은 분명하기에 회담성패와 관련된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최근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 가능성 논의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악에는 없어도 회의가 진행될 수 있을 정도의 비중이었기에 회의의 성패에 대한 책임에서는 그 만큼 경감되는 처지다. 따라서 회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책임은 미국이 제일 많이 지게 되어 있다.
한국정부가 6자 회담에 일관성 있게 집착한 것은 미국과의 2인3각 외교관계를 고려하면 당연한 것이었으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조치였지만 한계도 있다.
만약 미국이 기존의 대북 강경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회의가 지난 4년간의 행보처럼 지지부진한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가 나중에 이라크에 이어 이란 문제가 종료된 뒤 북한을 결정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더 이상 지지부진한 6자 회담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공격에 나서겠다고 하면 막을 힘이 없기 때문에 한국정부의 역할에는 어차피 한계가 있다.
한국 정부는 회의에서 거부권이 없으며 또 2인3각의 관계에서 미국측을 이끌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의 선택은 차후 미국의 일방적인 대북 공격이 있을 경우에 미국에 6자회담에 복귀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제한적이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2인3각 상황 도래
문제는 지금 상황이 그동안의 2인3각 관계와 다른 국면으로 변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은 부시행정부가 강경기조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독자 행보를 위한 입지가 대단히 좁았다.
하지만 지금 부시행정부는 내상을 입고 외교 주도권을 잃은 상태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정부의 독자 행보가 필요한 상황이다. 미국은 지금 독자적 행보보다는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외교에 의존하며 그저 조용하게 따라가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을 읽어야 한다. 부시행정부가 미국 정계에서 비판자들의 공격에 노출된 국면이기 때문에 이제 부시행정부로서는 북핵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어 회피하고 싶은 부담스런 사안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잘 읽고 부시행정부를 돕는 독자적 행보를 펼치면 그동안의 끌려가는 외교와는 달리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지금 미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도 도전할 수 없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없지만, 그런 나라를 대표하는 부시행정부나 정치인 및 관료들의 입지는 다를 수가 있다. 부시행정부는 지금 북한의 대담한 조치로 인해 정치적으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으며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자 한다.
북한 역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하여 벌리는 도전게임이 결코 편안할 수만은 없다. 생명을 담보로 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 역시 다가오는 북-미간 충돌상황이 한반도의 위기를 불러올 것이기에 어렵다.
따라서 세 주요 당사자가 서로 국면 타개에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진지한 의식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중재를 잘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다행이 북한이 이번 공식성명에서 핵보유국이 되려는 야망보다는 비핵화와 대화의 길을 걸을 것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다. 부시행정부 역시 곧 바로 강경대응을 하지 않고 평소와는 다른 조용한 외교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결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외교 주도권을 쥐고 북미간 중재에 나설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기가 어렵게 된 부시행정부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기에 2인3각 게임에서 새롭게 형성된 우호적인 국면이 도래한 것이다.
일식이나 월식처럼 제한된 시기동안 나타나는 이러한 기회를 놓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되면, 한국정부에 허용된 주도적 외교의 공간이 폐쇄되면서 곧 바로 안보위기 국면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덧붙이는 글 | 기자는 <노오(No)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한국>(1992) <대북한 핵억제정책과 합리적 선택>(1995) 등의 책과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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