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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폭주하는 시민들의 성난 전화로 서울교통상황실은 완전히 마비되어 버렸다. 종로3가에서 광화문까지 버스를 탄 한 시민은 무려 10만원이 넘는 요금이 찍혔다며 언성을 높였다.

도로의 운전자들도 혼란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자동차 계기판의 네비게이션 스크린은 "NO SIGNAL"만 깜박이며 운전자들을 속 터지게 했다.

어렵사리 도착한 사무실 한켠의 TV 화면에서는 부산항에 입항하던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느닷없이 항로를 이탈하며 좌초했다는 긴급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006년 6월 26일 아침 6시, 미국은 한반도 전역에서 GPS 신호를 차단했다. "



▲ EU는 총 30개의 위성을 발사해 미국의 GPS에 대항하는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2008년까지 완성할 계획이다.
ⓒ ESA
한미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이 한반도 상공에서 예고 없이 GPS신호를 차단할 경우 벌어질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다.

GPS는 미국이 구축한 군사용 위성항법시스템이지만 정보통신 인프라로서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이 1990년 이후 민간에도 GPS 좌표값을 무상 개방하면서 상용화의 길이 열렸다.

정부 관련 프로젝트를 자문하고 있는 GPS 전문가 이아무개 교수에 따르면 '고의잡음(Selective Availability)'이 들어간 민간용 GPS신호의 수평정밀도가 100m인데 반해 미군이 사용하는 신호는 이보다 훨씬 정밀한 22m 수준이다.

미국은 또 필요할 때 언제든지 목표 지역 상공에서 GPS 신호를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한 GPS-3 시스템을 2012년까지 구축할 계획이다.

실제로 GPS 전문가들은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알카에다 요원들이 GPS 단말기를 작전에 활용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이 이 지역에서 GPS 신호를 차단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미국이 원할 때는 GPS 송신 차단 가능

미국의 돈으로 구축한 미국의 인프라를 미국이 신호를 차단한다고 해서 공짜로 정보를 사용하는 다른 국가에서 항변을 할 수는 없지만 GPS 정보에 대한 의존도가 날이 갈 수록 높아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일말의 불안감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

지난 21일 우리 정부가 공식참여를 선언한 GNSS는 이러한 우려에 대한 유럽의 답이다. 일명 갈릴레오 프로젝트로 불리는 GNSS는 유럽판 GPS인 셈.

30억 유로를 투자해 총 30개의 위성을 2만4천km 상공에 띄워올리는 갈릴레오 프로젝트가 오는 2008년 완료되면 유럽은 미국의 GPS를 능가하는 강력한 위성항법시스템을 갖게된다.

우주전력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약화시킬 것이 틀림없는 EU의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미국이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 없다. <와이어드>에 따르면 폴 월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EU에 수차례 서신을 보내 이 무모한 프로젝트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고 EU가 갈릴레오 프로젝트를 강행할 경우 결국 나토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주간 <비즈니스>가 2004년 10월에 공개한 미 공군의 기밀자료는 EU가 중국 등 적성국가에 민감한 군사정보를 제공해 미군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미국은 갈릴레오 위성을 격추하는 옵션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일각에서는 GPS체제에 잔류하는 나라를 친미국가로, 갈릴레오 참여국가를 반미국가로 분류하려는 움직임까지 감지되고 있다고 잡지는 전하고 있다.

미국의 거센 압력이 오히려 잠자던 EU의 안보의지를 일깨운 것일까? 당초 갈릴레오를 상업용으로만 간주하던 EU는 미국의 거듭되는 폐기요청으로 이 우주인프라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달은 뒤 적극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지금은 오히려 돈이 남아도는 형편이라고 <파이낸셜 타임스>는 전하고 있다.

한국 갈릴레오 참여로 반미국가 합류?

미국이 탄생 자체를 바라지 않았고 참여하는 나라는 반미국가로 규정해야 한다는 거친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이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미국의 50년 혈맹인 한국이 공식참여를 선언한 것은 그래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아니나 다를까?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이 EU에 갈릴레오 참여의향서를 발송한 사실을 별도의 경로를 통해 파악한 미국은 지난 해 11월 한국에 대표단을 급파했다고 한다.

미국 대표단은 이 자리에서 한국이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물었고 한국측은 "향후 급성장할 EU의 위성항법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상업적 의도에서 참여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전한다. 갈릴레오 시스템에 기반한 위성항법시장의 규모는 약 200억 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식 입장. 정부는 갈릴레오 프로젝트 참여를 결정하기 이전에 이미 군사.안보.외교적인 파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측면을 검토했다는 것이 정부 관계자의 확인이다.

▲ 갈릴레오 프로젝트 개념도
ⓒ ESA
한국이 갈릴레오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위치정보의 수평정밀도는 4~6m 정도이고 이는 GPS 위치정보에 비해 90% 이상 향상된 수준이다.

미국은 2004년 6월, 갈릴레오가 GPS와 상호호환되는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EU와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긴장은 여전하다.

특히 중국이 2억유로의 지분으로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참여해 EU 회원국에만 허용되는 1급 데이터인 PRS(Public Regulated Service)에의 접근을 집요하게 시도하면서 미국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다.

중국은 또 자국 내 '시창' 우주기지에서 갈릴레오 위성을 발사해 주는 형태로 현물 참여를 희망하고 있지만 중국이 발사과정에서 민감한 우주군사기술을 습득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미국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고흥우주기지서 갈릴레오 위성 발사 희망

이 교수가 만난 EU의 갈릴레오 관계자는 "EU가 한국의 참여를 희망하는 것은 미국의 견제로 중국의 운신의 폭이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상대적으로 제약이 덜하고 IT산업 또한 발전해 동북아 최적의 파트너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정부는 갈릴레오 프로젝트에 약 5천만 유로의 예산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중 현금 참여는 100만유로에 그치고 대부분은 현물, 기술 및 인력 참여 등으로 이루어질 예정이다.

그렇다면 현재 전남 고흥에 건설 중인 우주기지에서 갈릴레오 위성이 발사되는 모습을 기대할 수도 있는 것일까?

이 교수는 "2008년까지 이루어질 1차위성 발사에는 준비부족으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면서도 "후일 교체위성 발사단계에서는 한국의 발사기지가 나름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GPS의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그 동안 최신 GPS 기술을 한국군에 제공하는데 소극적이던 미국은 차세대 군용 M코드 수신기를 공동개발할 것을 제안하며 한국 달래기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이 교수는 한국이 갈릴레오 카드를 내세워 미국을 압박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과연 이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겠느냐고 지적했다.

갈릴레오 프로젝트 참여를 통해 궁극적으로 PRS 데이터까지 획득한다면 한국은 우주군사기술에 있어서 만큼은 미국 의존을 벗어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셈이다.

의혹의 시선으로 한국을 지켜보는 미국을 뒤로하고 미국와 유럽 사이에서 한국이 줄타기를 과연 잘 해나갈 수 있을까?

23일 일간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한.미.일 남방(南方) 3각 동맹에 갇혀있을수 없다"는 발언을 머릿기사로 전하고 있었다.

위성항법시스템(GPS)은 무엇?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는 미 국방부가 지난 1978년부터 우주공간에 구축해 온 위성항법시스템이다. 총 24개로 이루어진 GPS 위성은 24시간 우주공간을 선회하며 지구상의 수 백만개 GPS 단말기에 위치값을 송신하고 있다.

서울의 시내버스가 탑승거리에 따라 승객의 버스요금을 자동으로 계산하고, 차량의 네비게이션 장치가 지름길을 찾아주며, 비행기나 선박이 안전한 항로를 따라 항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GPS신호 덕분이다.

GPS는 한국의 CDMA 방식 휴대전화망이 시간과 위치를 정확하게 조정해 빈틈없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특히 IT업계의 뜨거운 화두인 유비쿼터스 환경 구축에 있어서는 핵심 중 핵심 인프라.

지표면의 유비쿼터스 단말기들이 서로 교신해 정해진 시간과 위치에 따라 데이터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정확한 좌표값이 필수적이고 GPS 위성이 우주공간에서 송신해주는 위치신호가 이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다양한 상업적 용도에도 불구하고 GPS는 근본적으로 미 국방부가 주도해 구축한 군사용 네트워크다. 크루즈 미사일이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고 CIA요원이 적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르기까지 미국 우주전략의 근간이 GPS다.

GPS는 1983년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 이후 레이건 대통령의 지시로 군사기밀에서 해제되어 공공용으로 용도가 변경되었고, 1996년 GPS의 상업용 잠재력을 깨달은 클린턴 행정부가 정보통신 인프라로 그 성격을 재규정하면서 GPS 좌표값이 본격적으로 민간에 개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민.관 합작으로 3개의 위성을 발사해 일본, 동북아, 호주 등을 8자 궤도로 선회하는 'QZSS'라는 위성항법시스템을 독자적으로 구축하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구소련 역시 미국의 GPS에 대항해 글로나스(GLONASS)라는 독자적인 군사용 위성항법시스템을 구축했으나 구소련 붕괴 이후 관리소홀로 현재는 거의 무용지물인 상태다. / 민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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