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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얼마 전에 하신 말씀을 당신이 한 줄을 모르시고 또 다시 말씀하시는 걱정스러운 일도 생겼습니다.

처음에 그런 일을 겪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그거 전에 말씀하신 거잖아요"하면서 말씀하시려는 아버지를 막아서고는 했는데, 지금은 혹여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 증상을 아실까봐 처음 듣는 것처럼 아버지의 말에 "네, 알았어요" 하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다 끝날 때까지 듣곤 합니다.

그런데 걱정스럽게도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증상을 알아버리신 듯합니다. 이제는 전화를 해서 "애비야, 내가 이 얘기 했냐?" 먼저 물어보시고는 다음 말씀을 이으십니다. 그리고 집에 무슨 일이 있거나 당신께서 챙기셔야 할 일이 있으면 저에게 전화를 해서 "애비야, 아버지가 이 때 이 때 무슨 일을 해야 하니 네가 기억하고 있다가 전화하거라" 하십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의 기억을 더듬고 또 더듬어, 당신이 잊지 말아야 할 일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을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마음이 아파 옵니다...


작년 10월 8일에 <오마이뉴스>에 제가 올린 기사('어떻게 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가요?') 내용 중 일부입니다.

맞습니다. 올해 일흔 다섯이신 저희 아버지께서는 치매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평생 농사일을 하신 분이니 농사일에 대해서는 모르실 것이 없을 것 같은 데도 요즘은 시시때때로 동네 이장님한테 "이거 지금 하면 되나? 이거 이렇게 하면 되나?" 하시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물어봅니다. 당신의 머리에서 지난날의 기억들이 사라진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억의 끈을 자꾸 놓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많이 불안해하고 계십니다. 혹여 치매현상이 더 악화돼 자식들한테 짐을 안길까봐 그것이 두려우신 겁니다. 자식 듣는데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안 되는 줄은 알지만 당신 마음이 그렇다하시면서 "살만큼 살았으니 나쁜 꼴 보이기 전에 얼른 죽어야 할 텐데" 하십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저 이런 아버지 보면서 진짜 마음이 아프거든요. 점점 쇠약해 가는 당신의 육신과 당신의 존재와 당신의 자식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는 영혼의 상처가 점점 깊어지는 우리 아버지 보면서 진짜 마음이 아프거든요.

그런데요, 존경하는 전 의원님이 얼마 전에 '치매 노인'과 관련된 발언을 하셨더군요. 최소한 이 땅에서는 정치가가 아닌 정치꾼만 있으니 그 정치꾼들의 말들에 일일이 흥분하거나 술안주 삼는 것들이 내 인생 참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고, 내가 바보가 되고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그냥 재미삼아 정치이야기들을 보고는 있습니다만, 오늘은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때문에 기꺼이 피곤해지기로 했습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지금 제 속에 냄비 하나가 있습니다. 부글부글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마 속에서 찌개가 끓고 있나 봅니다. 재료가 뭐냐고요? 김치는 아니고요, 수없이 많은 말들이네요. 이거 다 전여옥 의원님이 제게 주신 선물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알려드리면 혹시 저 고발할지도 모르니 차마 말은 못하겠네요. 방금 전에 기사 보니까 전 의원님 발언을 기사화한 어느 매체에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면 혹시 압니까 저도 고발당할지. 그래서 무서워서 말 못하겠네요. 그리고 저 아프신 우리 아버지하고 새끼들 먹여 살리려면 돈 벌어야 하기 때문에 존경하는 전여옥 국회의원님께 고발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어떤 때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에이, 나도 국회의원 한 번 해볼까? 면책특권 있겠다, 설령 무슨 말을 해도 그게 다 정치적인 발언이라고 발뺌하면 되니까 이럴 때 확 쏴붙이는 건데 말이야. 성질나면 맥주병도 한 번 던져보고. 그런 나 보고 다른 당에서 뭐라고 하면 '음해, 정치탄압' 그동안 하도 많이 들어서 잊어버리지도 않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님들의 말 나도 한 번 써먹고, 또 '너나 잘하세요!'라고 한 방 먹이기도 하고.'

국회윤리위원회가 있어서 안 된다고요? 에이, 또 거짓말하시네. 윤리위원회는 무슨 윤리위원회. 그거 '막말하는 국회위원 면책 위원회' 아닙니까? 국민들은 다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국민여러분? 국민 여러분이라고 하니까 제가 국회의원 같네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국민'이잖아요. 다 자기를 위해서면서 말끝마다 "국민을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참 듣기 역겨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누구처럼 약간 이성을 잃어가나 봅니다. 자꾸 막말이 나오려고 하네요. 이럴 때 저는 저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야, 장희용! 넌 사람이잖아.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답게 살아야지 그런 막말 쓰면 되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부글부글 끓는 제 마음속 단어들을 차마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아주 아주 많은 분들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속 단어가 무엇인지 아실 테니 또한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께서도 들을 만큼 듣고, 볼 만큼 봤을 텐데, 그래서 지금쯤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혀 있을 텐데, 혹시 이 글이 많은 사람들한테 읽혀지면 그 분노의 불똥이 제게 튈까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픈 우리 아버지하고 새끼들 있는 몸인지라 무서워서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치매노인이 뭐 어쨌다고요. 얼어붙어 있다가 뭐 어쨌다고요? 맞습니다. 치매 현상이 있으시면 어떤 순간에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더군요. 우리 아버지 뵈니까 무슨 일을 하시다가도 어떤 순간에 얼어붙은 듯 가만히 계십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당신의 기억을 더듬느라 그러시는 겁니다. 수십 년 해 온 일인데도 기억이 나질 않아 그 기억 떠올리느라 그러시는 겁니다. 그래도 생각이 안 나면 동네 분들에게 물어보고, 이장님한테 전화로 물어봅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그런 아버지 옆에서 지켜보는 자식 마음,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은 아십니까? 제가 인생을 산지가 얼마 안 되는 지라 '마음이 시리다'는 말을 아직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요, 그런 아버지 바라보고 있으면 진짜 마음 시립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치매 걸린 노인이 얼어붙어 있다가'라는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의 말, 치매 현상을 보이는 분들과 그 분들을 옆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식의 시린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이라는 거,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지금 의원님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화가 난다면, 그것에 분노하기 전에 먼저 이것부터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의원님이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답이 나올 겁니다. 그래도 혹여 그 분노가 너무 커서 답이 생각이 안 나실까봐 마지막으로 이 말을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께 드립니다.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 의원님은 부모님 안 계시나요?

덧붙이는 글 | 존경하는 전여옥 의원님께서는 정치적 판단을 떠나 치매를 앓고 계시는 분들과 그 주변분들에게 빠른 시일내에 사과할 것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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