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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야마씨 댁. 오래된 집이기도 하지만 묵직한 색상덕에 고풍스런 느낌이 난다
다카야마씨 댁. 오래된 집이기도 하지만 묵직한 색상덕에 고풍스런 느낌이 난다 ⓒ 유신준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맞다. 슈는 아버지 다카야마씨의 작품 같은 존재다. 몇 년 전에도 도쿄에서 집까지 20여 일이나 걸려 중간에 병원에 입원하는 고난까지 겪으면서도 홀로 자전거 여행을 끝까지 수행해 낸 장본인이다.

사랑스런 자식일수록 힘든 여행을 시켜라. 아버지의 지론에 슈가 수긍해서 실행한 '부자합작' 자전거 여행이었다. 슈와 이야기를 해보면 작은 다카야마가 느껴질 정도로 아버지와 생각이 많이 닮았다.

딸 쿄코(杏子)는 고2 학생이다. 몇 년 전에 놀러 갔을 때는 싹싹하고 붙임성있는 아이였는데,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져 처녀티가 난다. 슬그머니 남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으니 건넌방 아빠 쪽을 가리키며 집게손가락을 입에 댄다. 다른 건 개방적이신데 이성교제는 엄격하시단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공부하라고는 하지 않지만 자신의 목표가 있으니 시간을 쪼개 공부하는 중. 어디를 가나 고2는 고달픈 시절이다.

10년 세월을 건너온 인연의 끈

다카야마씨와는 인연은 10년이 넘는다. 한참 일본어 공부에 재미가 붙었을 때 자유여행으로 후쿠오카를 택했고, 그때 동행한 멤버 세 사람 중 하나와 줄이 닿아 방문했던 곳이 바로 다카야마씨의 과수원이었다. 10년 세월동안 인연의 끈이 소멸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준비해간 파김치가 진짜 '파김치'가 되었지만, 맛이 최고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 마음이 통하듯 맛도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그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이 제일 흐뭇한 법. '오이시(맛있다)'라는 표현 하나로 아내는 산 넘고 바다 건너온 수고를 모두 잊었다.

음식은 정성이다. 김치가 맛있었던 것은 매운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집에서 손수 담가서 그곳까지 가지고 간 정성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김치종류는 물기가 많은 짐이어서 취급하기도 어렵고, 무거운 물건들이라 가져갈 때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며 그렇게 힘들게 가져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거봉포도는 이곳 다누시마루의 주 작목이다. 동네에 거봉 포도 와인공장까지 있다.
거봉포도는 이곳 다누시마루의 주 작목이다. 동네에 거봉 포도 와인공장까지 있다. ⓒ 유신준
딸 쿄코를 제외하고 식구 모두 김치 마니아라서 우리 김치가 식탁에서 판을 쳤다. 저녁이건 아침이건 자기들의 일본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형편이 돼 버렸다. 이 집뿐만이 아니다. 웬일인지 내가 아는 일본사람들은 모두 김치를 제일 좋아하는 음식으로 친다.

부인 유우코씨는 한국드라마 팬이다. <겨울연가> 정도는 줄거리를 나보다 더 상세하게 꿸 정도다. 우리 가족은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편이라서 우리도 잘 모르는 한국 드라마를 그녀에게 들어서 알게 되는 경우조차 있다.

요즘은 NHK에서 방영하는 <대장금>(유우코씨는 그냥 '장금'이라 했다)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주말 늦은 밤에 편성이 돼 있는데도 시청률이 높단다. 다음 편을 기다리느라 목이 빠질 지경이라며 웃는다. 일본에서 한국드라마 붐이 느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길어져 밤이 이슥해져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시골마을까지 한국어 붐

아내는 이곳에 오기 전 김치선물 이외에 김치만두 재료를 준비했다. 이곳에 와서 우리 음식을 소개하고 함께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한다며. 김치와 당면 이외에 다른 재료들은 준비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침에 유우코씨와 잠깐 장보기를 했다.

만두 속 재료인 소고기와 숙주나물은 오는 동안 상하는 물건이라 준비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곳에 숙주나물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우리가 미리 준비해 온 당면까지도 일본 마트에 있었다며 다음부터는 김치 하나만 준비해오면 되겠다고 한다.

한국어 교실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장 왼쪽이 부인 유우코씨, 가장 오른쪽이 다카야마씨.
한국어 교실 사람들이 찾아왔다. 가장 왼쪽이 부인 유우코씨, 가장 오른쪽이 다카야마씨. ⓒ 유신준
태풍대비로 온 집안이 부산하다. 감과 포도 과수원을 하는 다카야마씨네는 오늘 밤 도착할 태풍 13호가 큰 걱정거리다. 작년에도 태풍피해를 본 적이 있어 집안을 단속을 하는 손길이 꼼꼼하다. 창문까지 빼놓지 않고 두꺼운 합판을 대고 못질까지 한다. 고국에서는 이런 태풍을 겪어본 적이 없다.

방송에 의하면 10년 전에 규슈를 할퀴고 간 유명한 녀석보다 더 센 놈이란다. 슬그머니 걱정이 되는데, 다카야마씨는 일상적인 일을 치루 듯 태평하다. 게다가 간간이 유머도 잊지 않는다. 어쩌면 유머를 통해 태풍 걱정을 잊어보려고 하는 속내인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다카야마씨의 한국어교실 친구들이 찾아왔다. 중년 여성 네 사람. 엊저녁에 다카야마씨가 우리가 도착한 것을 전화로 알려 주었단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니 한국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까지 한국어에 열심인 것은 아마 한국 드라마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의 위력을 다시 실감한다.

바닥에 지천으로 흩어진 포도들. 농민의 마음이 아프게 전해온다.
바닥에 지천으로 흩어진 포도들. 농민의 마음이 아프게 전해온다. ⓒ 유신준
그들을 돕는 것은 일본어가 아직 능숙하지 않은 아내가 적격일 것 같아 혼자 밖으로 나왔다. 밖은 태풍대비로 부산하다. 지난해의 가벼운 태풍에도 피해가 발생해 300만엔 가까이 견적이 나왔단다. 농업개방 이후에 보조금 혜택도 없다. 사람을 사서 직접 작업한 결과 100만엔으로 겨우 해결했다고 한다.

점심 무렵까지 다카야마씨 가족들과 함께 줄기에 남아있는 거봉 포도를 잘라버리는 작업을 도왔다. 포도송이가 무겁기 때문에 태풍이 불면 그로 인해 포도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시설이 쓰러질 수도 있어 그것을 방지하느라 어쩔 수 없이 하는 작업이다.

버려지는 포도들이 안타깝다. 함께 일하던 유우코씨는 올해는 풍작이어서 냉장시설에 이미 출하 물량들을 꽉 채워놓았다고 염려 말란다. 이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그냥 줄기에 달린 채 놔둔 것들이니 괜찮단다. 품질 좋은 포도들이 바닥에 지천이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훌륭하게 키운 것들을 잘라버려야 하는 농민의 마음이 아프게 전해온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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