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전날 아는 사람들을 위해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는 일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예산을 고려해야하는 절차가 있기는 하지만 즐거움마져 방해하지는 못한다. 몇 군데 상점가를 돌며 이곳저곳 기웃거려 선물 몇 가지를 골랐다.
선물을 준비하다보니 우리들을 위한 선물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선물을 사는데. 그래 우리를 위한 선물도 하나 사자. 아내는 고르고 골라 침대 옆에 둘 2천엔짜리 터치 등을 샀고 나는 그동안 배우고 싶어 하던 키보드를 골랐다. 만 2천엔 짜리.
원래는 집에 키보드가 있었다. 딸이 쓰겠다고 가져가는 바람에 하나 있었으면 하던 차에 키보드가 눈에 뜨인 것이다. 배워야지 배워야지 하면서 늘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물건. 그러면서도 기어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또 키보드에 손이 가는 걸 어쩌랴.
가격은 꽤 저렴한데 소리를 들어보니 늘상 듣던 전 것보다 청명한 느낌이다. 만엔 이상은 충동구매하지 않기로 했으니 하룻밤을 자고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고 일단 돌아왔다. 결국 그리 비싸지도 않고 생활을 풍부하게 해줄 물건이니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끙끙거리며 가져와서 비좁은 호텔방에 들여놓았다. 바라 볼 때마다 즐겁다. 남들에게는 사소한 것들이고 별 의미가 없겠지만 우리에게 특별한 것들이다. 이것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일본에서 보냈던 열흘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출국날 아침에 짐을 챙기는데 어제 구입한 키보드가 부피도 크고 무게도 있어 걱정스럽다. 키보드 뿐만 아니라 헌책도 페니어에 가득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할것 같다. 택배 편을 알아보니 국제택배가격이 키보드만 보내는데 2만 2천엔이란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것도 유분수지. 가격을 듣고 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는 택배회사 직원이 우체국택배가 좀 쌀 것 이란다. 우체국 택배가 아무리 싸다해도 만엔을 넘어설 것 같아 택배는 포기하기로 했다. 물건값보다 옮기는 비용이 비싸다니. 그냥 끌고 가보자.
자전거에 무리하게 짐을 싣다
짐을 정리하다보니 한번도 입지 않은 옷가지들이며 쓰지 않는 물건들이 많이 나온다. 꼭 필요한 짐을 챙겨보고 거기서 또 절반을 줄이라는 자전거 여행조언을 가볍게 생각한 탓이다. 쓸데없는 여분의 물건들이 짐이 되어 자전거여행을 더 힘들게 했구나.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얻는다. 이래서 경험은 중요한 것이다.
짐들을 호텔로비에 꺼내 놓았다. 자전거로 실을 수 있는 짐의 한계를 이미 넘어선 것 같다. 택시를 부르느냐 버스를 이용하느냐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나선다. 이미 싸놓은 짐을 끌러 다시 한번 차곡차곡 꾸려본다. 40대 아줌마의 억척스러움 덕에 자전거에 실릴 정도로 부피가 줄었다. 줄었다고 해도 그 많은 짐이 어디 가겠나. 딱 이삿짐자전거 수준이다.
자전거는 보통 시내에서 보도주행을 하지만 내 이삿짐자전거로는 무리일것 같다. 다행히 호텔이 하카타역 근처라서 부두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한 20분쯤 걸렸을까. 차선을 통째로 차지하다시피하며 국제터미널까지 무사히 옮겼다.
수화물 부칠 때 확인한 짐무게가 40kg을 넘어섰으니 내 몸무게까지 합하여 100kg을 넘게 견딘 것이다. 그러고서도 자전거는 끄떡없다. 열흘 동안 펑크한번 없었다. 대단한 내 자전거 알로빅스. 수화물료 1700엔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짐 걱정에서 풀려났다.
국제 터미널을 떠나기 전 신세진 두 분 댁에 전화를 걸었다. 고생했단다. 부럽다고도 했다. 11월에 김장 담글 때 꼭 한국에 놀러 오시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드디어 귀국이구나. 엊그제 도착한 것 같은데 열흘이 금방이다.
멀어지는 하카타 항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롭다. 비 맞으며 출발해 온갖 우여곡절을 다 겪은 여행이었는데. 여행하는 동안 친절하게 도와준 이곳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결코 짧지않은 여행이었지만 어려울 때마다 이곳 사람들의 친절한 도움이 있어서 초보 자전거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배안에서 점심을 때웠다. 주위를 살펴보니 도시락을 따로 준비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호카호카테(따뜻한 집)의 도시락은 가격도 비싸지 않고 주문한 대로 즉석에서 만들어 주므로 신선하고 맛있다.
낮 12시 10분에 후쿠오카에서 배가 떴으니 4시간을 넘게 왔지만 아직 망망대해다. 가도가도 검푸른 바다에 끝없는 수평선이 이어진다. 밤배와 달라서 낮의 카멜리아는 갑판에 나올 수 있어 바다여행의 운치를 즐길 수 있다. 갑판에 나오니 바닷바람이 제법 거세다.
반가운 한국말
거센 바닷바람과는 대조적으로 검푸른 바다에 떠있는 흰구름은 한가롭기만 하다. 언제 이렇게 그림같은 흰구름을 한가롭게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배멀미로 고생하는 아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한낮 선상에서 여유로움을 오래도록 즐겼다. 마치 여행의 여운을 즐기듯이.
예정보다 10분일찍 도착한다는 승무원의 안내 멘트가 들려오고 뒤이어 멀리 부산항이 보이기 시작한다. 휴대폰이 터지고 여기저기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국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내나라 말을 듣는 안도감이라니. 드디어 내 땅에 도착했음을 실감한다.
짐을 옮길 걱정으로 서둘러 줄을 섰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배에서 내려 입국심사대까지는 꽤 먼 거리다. 짐 무게를 생각하면 휴대용 카트같은 것이 꼭 필요한데. 쓸데없는 여분의 물건들은 챙겨 넣으면서 정작 필요한 것은 짐을 줄인다며 가져오지 않았다.
입국심사는 여권만으로 OK다. 일본 입국시에는 입국신고서류를 준비해야 했는데 그 절차가 없으니 얼마나 간편한지. 자전거와 화물을 찾아 세관을 거쳤다. 자전거는 세관에서 현지 구입해온 것이 아닌지 꼼꼼히 체크 받는다. 구입한 물건이 휴대품 면세한도액 $400를 넘은 범위면 반드시 영수증 등 구입서류를 준비해 관세에 대비해야 한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떠날 때와 달리 부산항의 날씨는 맑았고 부산역까지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내가 지난번에 밖에서 고생한 것을 떠올리고 이번에는 자전거를 끌고 갈수 있는 데까지 가서 분해를 해보잔다. 홈티켓은 어느 개찰구나 상시 무사통과다.
개찰구를 통과하니 복도 우측으로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부산역의 엘리베이터는 얼마나 큰지 자전거 2대와 그 많은 짐들이 들어가고도 남는다. 지난 번에는 이것을 몰라서 짐을 끌고 오르내리느라 고생깨나 했는데. 자전거를 끌고 플랫폼까지 들어왔다. 경험이 보배다.
이미 반쯤 자전거 해체 베테랑이 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20분만에 분해완성. 처음에 비긴다면 대단한 속도다. 자전거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것이 항상 큰 걱정이었는데 끝날 즈음에서야 겨우 요령이 붙었다. 이제야 요령이 붙기 시작했으니 우리 다시 떠나볼까. 아내가 웃으며 바라본다. 탑승준비를 마치자 미끈하게 생긴 서울행 KTX가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