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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다른 세상을 여는 훌륭한 도구이며 마법의 열쇠다.
언어란 다른 세상을 여는 훌륭한 도구이며 마법의 열쇠다. ⓒ 유신준

구마모토는 내게 인연의 땅이다. 8년 전, 그러니까 98년에 교류연수 기회가 있어 이곳에서 아홉 달 동안 살았던 적이 있다. 지금 찾아가는 우츠노미야씨도 그때 인연을 맺은 분이다. 그분 근무처가 현 경찰본부였는데 내가 근무하던 현청과는 사이좋게 붙어있는 건물이었다.

어느 날인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현청 앞 은행나무 정원에서 쉬고 있는데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서로 알게 됐다. 알고 보니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분. 우연히 서로 알게 되어 내가 귀국한 뒤에도 서로 잊지 않고 가족끼리 왕래하며 인연을 소중히 이어왔다.

언어란 다른 세상을 여는 훌륭한 도구다. 소통되지 않으면 그냥 그림 속의 박제된 세계일 뿐이지만 언어가 통하면 그 세계가 살아 움직이며 통째로 다가온다. 말이 통하는 순간 가로막힌 장벽이 풀리고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단지 그림 속의 풍경처럼 느껴졌던 피상적인 세계가 실제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는 마법. 언어란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법의 열쇠가 되는 셈이다. 이곳에서 살았던 아홉 달 동안 느낀 생각들이다.

구마모토 초입에서 우츠노미야 댁 위치를 묻기 위해 파출소에 들렀다. 경찰관이 지도까지 그려가며 상세히 설명해준다. 설명을 듣다보니 아뿔싸, 목적지인 오미네까지는 거리가 20km가 넘는단다. 구마모토에 도착하면 금방일 줄로 알았는데. 시내를 향하는 길이 완만한 내리막으로 이어져 힘들지는 않았다.

구마모토에는 노면전차가 있다. ‘로덴’이라고 부르는 노면전차는 이곳의 도심을 달리는 주요 교통수단이다. 전찻길은 차도에 나있어 자동차와 차도를 함께 쓴다. 처음 봤을 때 자동차와 전차가 도로를 사이좋게 달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신기했던지.

지도로 알기 힘든 길이 나올 때마다 몇 군데서 더 물어본다.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얘기뿐. 하긴 20km라는 거리가 자전거로 간단히 해결될 분량이 아니다. 달리는 동안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시내라서 야간 주행에 걱정은 없으나 배도 고프고 피곤해졌다. 우선 저녁을 먹고 기운을 내보기로 하고 근처 회전초밥집을 찾아 들어갔다.

밥 위에 얹은 회가 큼직하고 초밥이 제법 맛있다. 대개의 경우 회전초밥집은 한 접시에 100엔 짜리가 많은데 이곳은 좀 비싸다. 작은 접시 하나에 200∼300엔은 기본이고 더러 500엔 짜리도 보인다. 어쩐지 맛있다 했더니… 저녁을 먹고 나니 좀 기운이 난다. 다시 길 찾기를 시도해봤지만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며 시내에서 길 찾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길을 잃고 국제미아가 될 뻔하다

인구 60만의 큰 도시 구마모토를 우습게 보다가 한밤중 국제미아가 될 뻔했다
인구 60만의 큰 도시 구마모토를 우습게 보다가 한밤중 국제미아가 될 뻔했다 ⓒ 유신준
이곳에 겨우 몇 개월간 살았다고 자만을 한 것이 화근이다.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현청까지 주변지리나 겨우 알 뿐 시내를 자전거로 돌아본 경험도 별로 없는 주제에. 돌아봤다고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작은 동네 길도 아닌데. 인구 60만의 큰 도시 구마모토를 우습게 보다가 졸지에 한밤중 국제 미아가 돼버렸다.

우츠노미야씨의 부인 노리꼬씨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공중전화를 찾는 것도 만만치 않다. 휴대폰 영향으로 점점 공중전화가 없어지고 있는 추세는 우리나 마찬가지. 어떻게든 찾아가 보려고 길을 헤매다가 밤 9시가 넘어서야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10분 정도 지나니 그녀가 나타난다. 자전거는 그곳에 세워 두고 짐만 겨우 챙겨서 집으로 가져 왔다.

우츠노미야씨네는 딸 둘에 아들하나해서 모두 다섯 식구다. 갓 결혼한 큰딸 요시꼬는 아빠와 같은 현 경찰본부에 다닌다. (지금은 아빠가 잠시 미나마타라는 곳에 전근중이다) 둘째는 아들이 사토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중이다. 막내딸 사야카는 자유분방한 대학생이다.

노리꼬씨도 한국드라마의 왕 팬이다. 그녀도 NHK에서 요즘 방영중인 장금이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다. 드라마 내용이 요리를 좋아하는 이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모양이다.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가도 가업을 잇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둘 정도로 전통 있는 직업이 대접받는 땅 아닌가.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난을 겪는 이야기도 이 사람들 정서에 맞는 내용이니 공감을 얻었을 테고. 그러니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고루 갖춘 <대장금>이 화제일 수밖에. 잘 만든 드라마는 국경을 초월하여 어느 곳이나 먹힌다. 문화는 어디서나 통한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거실 벽에는 노리꼬씨가 성인식에 입었다는 화사한 기모노가 걸려있다. 아내에게 입혀주려고 준비해뒀다는 것이다. 그녀의 성인식이라면 장장 32년이나 묵은 물건. 지금도 거실한 가운데서 당당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해온 물건인지 지금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 우아하고 화사한 모습이다. 나가쥬반이라는 속옷을 갖추고 그 위에 기모노를 기품 있게 입은 다음 오비라고 부르는 띠까지 매는데 1시간 가까이나 걸린단다.

밤늦게까지 시내를 헤매느라 피곤할 거라며 준비해놓은 방으로 안내한다. 그녀가 시집올 때 해왔다는 묵직하고 푹신한 혼수이불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것을 깔고 덥고 편한 잠을 잤다.

시간을 아껴 일하는 부지런한 사람들

두부요리 전문점 입구. 자연은 누구에게나 격조있는 친근감을 준다.
두부요리 전문점 입구. 자연은 누구에게나 격조있는 친근감을 준다. ⓒ 유신준
아침 출근길에 갓 결혼한 큰딸 요시꼬가 집에 들렀다. 마침 가까운 곳에 신혼집을 구하게 돼서 늘 드나든단다. 결혼선물로 아내가 보내준 부부잠옷이 잘 맞아 고맙다며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린다. 그녀의 결혼식 때 참석하여 일본 결혼식도 구경하고 축하해주려 했는데 일이 바빠 오지 못했었다. 대신 아내가 그들을 위해 예쁜 커플잠옷을 골라서 보냈었다.

오늘은 마침 노리코씨의 아르바이트가 쉬는 날이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자전거 둔 데까지 차로 이동해서 자전거를 가져왔다. 노리꼬씨를 먼저 보내고 알려준 대로 길을 찾아오다 보니 잠깐이다. 거의 다 와서 헤맨 거였다. 오는 길에 아내와 둘이서 슈퍼마켓까지 들러서 이번 일본 일정의 최대 이벤트인 김치만두 장보기를 했다.

미나마타에 전근 가 있는 우츠노미야씨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번에 우리 일정에 맞춰 휴가 내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지난번 큰딸 요시꼬의 결혼식 때 휴가를 냈기 때문에 휴가허락을 얻지 못했다며 자기가 없어도 하루만 더 머물다 가란다. 미안하지만 여행일정 때문에 우리는 오늘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점심은 좀 먼 곳 식당에서 근사한 코스요리를 대접받았다. 두부요리 전문점이었는데 두부로 만든 요리가 줄지어 나온다. 세상에 그렇게 다양한 두부요리가 가능한 것인지 처음 알았다. 일본식으로 잘 꾸며진 정원을 바라보며 호사스런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돌아와 보니 아들 사토시가 오전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와 있다. 노리코씨는 다른 집 아이들은 부모에게 기대어 빈둥거리는 반면 자기용돈을 벌어 쓰려는 아들이 대견스럽다며 대견하게 생각한다. 사토시는 아버지와 같은 경찰관이 되고 싶은데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채용시험이 꽤 어렵단다. 그래서 오전 동안 일하고 시험준비를 위해 저녁에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우츠노미야씨 댁 앞에서. 가운데가 부인 노리코씨, 오른쪽이 둘째 사토시
우츠노미야씨 댁 앞에서. 가운데가 부인 노리코씨, 오른쪽이 둘째 사토시 ⓒ 유신준
오전에 반죽을 해둔 것을 꺼내어 넷이서 함께 만두를 빚었다. 한판을 쪄내어 접시에 담아냈더니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김치만두라며 맛있다고 한다. 아들이 함께 모여 앉아 만두 빚는 광경을 휴대폰으로 찍어 아버지에게 전송한 모양이다. 우츠노미야씨에게서 다시 하루만 더 머물다 가라고 전화가 왔다.

떠나는 것이 여행자의 섭리다

우리에게는 이번 여행을 위해 짜놓은 일정이 있다는 것. 하루를 더 머물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머지 시간을 어렵게 여행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어쩔수 없이 지금 떠나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일정에 쫓기면 서둘게 되고 서둘면 여행이 힘들게 된다. 힘들면 자전거 여행이 즐겁지 않다. 우리는 이미 오늘 안에 구마모토를 벗어나 텐트를 치기로 결정했었다.

3시가 지나고 이제 떠나야 할 시간. 노리꼬씨도 아들 사토시도 아쉬워한다. 아쉬울 때 떠나는 손님이 뒤 꼭지가 더 아름다운 법. 가족들과 집 앞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출발했다. 짐을 덜고 좀 홀가분해지려 했는데 노리꼬씨가 준비한 선물 때문에 오히려 짐이 더 늘었다. 그녀가 자전거여행을 해봤어야 선물을 생략하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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