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의 중심부인 텐진거리로 향했다. 도심은 사람들이 많아서 쉬 피곤해지지만 활기가 넘치고 구경거리가 많은 곳이다. 우선 점심부터 해결하자. 작은 가게에 들어가 근처에서 맛있는 식당을 물어봤다. 유명한 라멘집이 있다며 한 곳을 알려준다. 가보니 벌써 예닐곱 명이 식당 앞에 줄을 만들고 있다.
그러실 리는 없겠지만 이름이 비슷하다고 인스턴트 라면을 떠올리시면 안 된다. 대체로 돼지뼈 삶은 국물에(육수는 다양한 재료로 여러 가지 맛을 낸다. 라멘집 노하우다) 생면을 넣고 삶은 뒤 널찍한 돼지고기 두어 점을 얹어 내는 것이 라멘이다. 맛은 느끼하고 짭짤하다.
우리 차례가 되니 종업원이 자리를 안내해준다. 크지 않은 실내인데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점심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라멘 한 그릇과 공기밥에 튀긴 만두가 딸려 나오는 메뉴다. 가격은 천엔 가까이 하는데 비싼 것 치고는 짜고 맛이 없다. 유명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후루루 마시고 나가는데 우리는 밥을 주 메뉴삼아 국수만 겨우 건져 먹었다. 오늘점심은 '대략' 실패다.
점심 후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을 찾았다. 내가 일본여행시 가장 좋은 노획물로 꼽는 것이 책이다. 책은 작은 부피로 많은 것을 담아 올수 있는 정보의 집약이기 때문이다. 부피에 비해 무거운 짐이 되지만 무거운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다. 정보가 많으니 구경거리도 많다. 사람들이 서점에 한번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아내와 떨어져 서로 신경 쓰지 않고 각각 관심분야를 찾아 다녔다. 책 몇 권을 고르고 나니 가격이 상당하다. 먼저 헌책방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귀국전날까지는 짐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도 벌써 무거운 짐을 만들고 말았다.
사연 많은 '텐트여행' 종치다
어젯밤의 한밤중 소동을 끝으로 파란만장한 텐트 여행은 이제 종치기로 결정했다. 든든하게 짐을 두고 다닐 곳이 만들어지므로 부담 없이 무거운 책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친김에 헌책방도 찾아보기로 했다. 알아보니 중고DVD와 CD, 헌책을 함께 취급하는 큰 서점이 하카타역 앞에 있었다.
헌책방이라고 해서 대충 펴놓고 파는 곳이 아니다. 각 부문별로 상세하게 구분해 찾기 쉽게 제대로 정리해 놓았다. 일테면 전문 헌책방이다. 가격은 대충 새 책의 50%선. 만화 단행본 앞에는 사람들이 늘어서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빠져 있다가 늦기 전에 호텔을 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모르면 묻는 게 가장 좋다.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사람이 주변지리를 잘 알거 같아서 이곳에 싸고 깨끗한 호텔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머뭇거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끼어든다. 자기가 오랫동안 묵고 있는 호텔이 있는데 깨끗하고 좋은 곳이라는 것.
일이 잘 되려면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데 나는 사람 복은 있지 않나 싶다. 그는 상세한 약도를 그려주고 전화번호까지 써준다. 내친 김에 아예 전화를 걸어 방이 있나 알아봐 주겠다고 앞장선다. 그 사람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호텔 예약까지 일사천리로 마쳐 버렸다.
장소는 하까다역 앞이다. 세미더블은 좀 더 싸다는데 이미 다 나가고 더블만 한곳이 남아있단다. 체크인 절차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니 그리 크지는 않지만 깨끗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이다. 게다가 창가에 공원까지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다.
오랜만에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왔다.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 지는지. 여행이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성공한거다. 단 사흘 밤의 텐트경험으로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의 고마움을 절감하게 됐으니까.
사람은 고생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일상의 고마움을 깨닫는 법이다. 몇 번 되지 않지만 텐트생활의 불편함을 통해 일상의 감사함을 제대로 느낀다. 일정한 주거가 있다는 것이, 사면 벽으로 둘러싸여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방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침대에 누우니 내 세상이다.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바깥 걱정 없이 편안하게 쉬었다.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사회
아내가 과일이 먹고 싶다고 해서 가까운 슈퍼에 들렀다. 별것 아닌 포도가 한 송이에 800엔씩이나 한다. 가격표를 붙인 포도송이들을 보고 있자니 흔전만전 잘라 버렸던 싱싱하고 맛있는 다까야마씨네 거봉포도가 생각났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있는 장소에 따라서 이렇게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 세상이치다. 포도는 포기하고 대신 사과를 몇 알 샀다.
길거리는 대도시답게 사람들로 넘쳐난다. 복장들도 가지각색이다. 복장은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개성의 표현이다. 이 사람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개성을 존중하는 풍토가 뚜렷하다. 지분라시사(자기다움)가 유행어라고 하던가.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남들 시선 같은 것은 개의치 않는다. 스스럼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한낮에 제법 뜨거운 햇볕을 느끼는 계절임에도 털옷과 털모자를 착용한 사람도 있다. 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표현하고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개성이 존중받는 사회다.
늦은 여름날씨에도 젊은 여성에게 부츠는 거의 일용품 수준이다. 그런가 하면 속옷차림에 가깝게 몸을 드러낸 차림들도 많다. 다양한 개성이 존재하고 그 다양함에는 우열이 없다. 양쪽을 정해놓고 어느 무리엔가 끼지 못하면 불안한 사람들에겐 더없이 부러운 풍경이다.
해외에 나가면 새로운 시각이 트이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 시각으로 볼 수 없었던 신선한 것들이 자주 눈에 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해외여행은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 보는 좋은 기회다.
여행이란 세상 보는 눈을 넓히는 작업이다. 세상 보는 눈을 넓혀 자신이 작아지는 경험이다. 주변에 눈길을 돌려 그것들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축소시킨다. 자신의 땅이,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일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보이는 근시안적 사고에서 벗어난다.
여행해보라.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던 자신의 것들이 순식간에 작아져 버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동네를 처음 떠나 본 시골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처럼.
덧붙이는 글 | 2006년 9월 15일부터 25일까지 떠났던 일본 규슈 자전거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