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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4개월이 되었다. 귀농 말이다. 귀농하기 전 서울에서 살 때 누군가가 말했다. "아마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사실이 되려면 2개월 남았다. 역 귀농 말이다. 아마도가 현실이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나는 그게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생각을 하고 있다.
간절한 생각을 하는 이유가 지금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어서는 아니다. 귀농을 하기 전 대화를 나누었던 선배 귀농인은 그렇게 말을 했었다. "시골로 내려오면 한 일 년은 행복하고 한 일 년은 고통스럽다. 그 뒤로 십년은 고통스러운 일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말해준다."
전적으로 그 선배의 말을 빌자면 나는 이제야 고통스러운 기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아직은 한창 행복한 것에 젖어 있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배의 말이 아직은 사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나와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해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럴 수 있는 기간이 8개월 정도는 남아 있다는.
이유야 어찌됐든 지금 내게 중요한 초미의 관심사는 역 귀농의 가능성이 농후한 6개월의 시한보다는 고통스러울 가능성이 큰 일 년이라는 기간을 잘 보내기 위해 준비해야할 것들에 대해서이다.
귀농 경험이 전무할 뿐더러 도시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는 사람이 말한 6개월의 시한은 사실은 어느 정도는 내가 가는 것에 대한 서운함쯤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귀농을 이미 했고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골에서 살아남은 지금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선배가 말한 일 년이라는 시한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 다가와 있다.
몇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이지만 역시나 먹고 사는 문제는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아니면 우주에 나가서라도 사람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 귀농 시한 6개월을 말했던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빚밖에 남을 게 없다는 시골살림을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일 년만 행복한 뒤에 바로 찾아오는 쓰라린 고통의 또 다른 일 년을 이야기했던 선배의 이야기 역시 시골에서 먹고 사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깨달은 좋은 조언이었을 것이다. 결코 낭만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그래 어쩌면 내가 지금 그런 낭만을 아직 버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가을걷이를 끝내고 볕 좋은 아스팔트 길 위로 나락을 말리는 촌로들의 무연한 표정을 보고 있는 요즘은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고 있다.
"역 귀농 시점인 6개월만 살까? 행복한 시점인 일 년만 살까?" 물론, 내 좋지 않은 머릿속을 교통하고 있는 많은 생각들 중에 이런 시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에 살면 이맘때쯤 사람 적고 단풍은 좋은 도대체 찾을 길 없는 그런 곳을 찾아 기껏 길을 나서지만 앞 차 뒤꽁무니만 30분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고속도로위에서 찍는 내 발등 같은 존재일 뿐.
농사를 짓는 것은 틀림없는 수순이지만 그것으로 오로지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가 감당하기에는 무리한 생각이란 것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나 명심해서 듣고 있는 말은 "귀농이라고 반드시 농사만 지으란 법은 없다"는 것이다.
논을 갈든 밭을 갈든 수익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농사를 몇 십 년 지어본 사람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대는 요즘의 농촌현실에서 가능성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운 대목임을 많은 사람들의 충고로 익히 들었던 상황이다. 게다가 무 농약 유기농 농법이란.
유정란 농장을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축사를 혐오하는 사람들의 편견 앞에 가로막히고 허가를 내기 위해 필요한 절차와 자금에서 다시 한 번 좌절하기도 했다.
아직은 계란 배달과 공사현장 인부로 시골생활비를 벌어대고 있지만 그리고 아직까지는 충분히 행복해 하고 있지만 기왕 대안적 삶으로서의 귀농을 한 바에야 직업이라고 회사원이 아닌 시골에 분명한 터전을 잡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몇 가지 원칙은 있다. 가능하면 내 가족의 모든 식량은 자급자족을 이루어낸다는 것과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과 자연친화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실제 정착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원칙들이 일부라도 훼손되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원칙들 속에서 서두르지 않게 계획을 세우고 또박또박 실천하다 보면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다는 판단이다. 아직 내가 무조건 행복할 수 있는 8개월이 더 남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지금 들로 산으로 나가보면 붉게 타오르려는 단풍의 화려함보다 먼저 내 눈을 압도하는 것들은 볕 좋은 아스팔트 길 위에 말려지는 나락들의 긴 행렬들과 잎 진 감나무에 매달려 있는 붉은 홍시와 황금빛으로 너울대는 가을 논의 풍성함이다.
그 나락의 장대함과 붉은 감의 현란한 색깔과 황금빛 바다의 풍성함에 앞서 나는 그 나락들에 밴 촌로들의 피와 땀을 보고, 붉은 감을 만들어낸 잎 진 가지를 보고, 황금빛 벼이삭이 깊게 뿌리내린 벗은 땅을 본다.
비로소 결실의 계절을 만들어내기 위해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거친 모습들과 고된 노동이 아니면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또한 쌀 수 있겠는가?
시골살이 얼마 되지 않은 이제야 논에 박힌 피나 구분할 줄 아는 처지인 내가 감히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초년 귀농생활은 그런 대로 괜찮은 수준이지 않나 하는 겁도 없는 자평을 해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6개월 시한은 문제도 아니고 1년 뒤에 오는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내야 하는 이유는 더 있다.
고기를 많이 먹어 본 사람이 고기 맛을 안다고 했다.
비록 4개월이기에 아직 쓴맛까지 못 보았을지 모르지만 내 아들 초등학교 2학년 선웅이는 "학교에 말하고 엄마 따라 지리산에 놀러 갈래? 그냥 학교 갈래?" 라는 제안에 그 제안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학교 갈래!"하고 내뱉을 만큼 시골학교와 친구들에게 푹 빠져 있다. 서울에서는 물론 제안의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지리산!"을 외쳤었다.
더하여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해야 했던 아내는 지금 시골에서의 삶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버는 게 불안정해서 좀 그렇지만 나 이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 알만 하겠어."
불과 넉 달 사이에 아내와 선웅이는 고기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선한 이웃들이 있어 더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서서히 나와 내 가족들은 지나면 한참을 더 달려야 나오는 유턴 지점 중 한 곳을 지나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여간 6개월은 문제없게 생겼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우리마을 홈페이지(www.educovillage.com)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