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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6개월 걸린 셈이다. 집을 기어이 완공했고 이사까지 마쳤다. 오해가 있을까 싶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6개월 동안 집을 지었단 이야기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허가문제라는 난제 중의 난제를 만난 것이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다.
하여간 집은 귀농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가능한 자기 손을 거치고 싶은 것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서점에 가서 귀농관련 책을 찾으면 단연 으뜸으로 나오는 것이 집과 연관된 책일 확률이 크다. 기실 좋은 집은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모든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BRI@소싯적부터 귀가 따갑게 배우고 들어온, 사람이 살아가는 필수적인 세 가지(의,식,주)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매우 건방진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래서 조심스럽게 고백하지만 나는 좋은 집에 대한 즉,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평수가 우람하거나 실내장식이 눈을 아프게 할 만큼 화려한 그런 집에 대한 욕심을 버린 지가 십년이 다 되어간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욕심 없는 삶에 일찍이 눈을 떠서 '세상사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내공 깊은 철학의 소유자도 아닌 이상은 다 그럴만한 아픈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이유인즉슨, 의도하지 않게 사업이 망했고 의도하지 않았던 서울 상경을 했지만 집도 절도 없는 당연히 월세 얻을 돈도 없었던 시절로 거슬러가야겠다.
그때 아내와 아들은 아내의 언니 집에 의탁을 하고 나는 정처 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절망하고 또 절망하며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망하면서도 유일하게 건진 티코 승용차를 타고 하릴없이 갈데없이 고속도로 위를 무작정 내달리다 어느 한적한 휴게소에 차를 주차하고 의자를 뒤로 한껏 젖히고 얼굴 위로 신문을 덮고 잠시 망상에 빠져들었을 때.
감은 눈 위로 절망의 나락 끝으로 투영되는 화면들이란 것이 고향집에서 아내와 나누던 아침 밥상과 베란다 빨래건조대에 걸린 아들의 기저귀와 여름 날 마트에서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아내의 뒤를 따라다니며 연신 하품을 해대며 카트를 밀던 모습들이었다.
가장 소중했던 것들은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들
가진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 보니 내게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것들은 우리가 항상 무심히 지나쳐왔던 가장 자잘하고 흔한 일상들이었다. 행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마저도 사실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공기 없이는 한순간조차 살 수 없지만 공기의 소중함을 간과하고 살 듯이 말이다.
그 때 나의 가장 소원하는 것들은 가소롭게도(?) 다시 그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물며 처형 집에 의탁해 있던 아내와 아들과 하루빨리 방 한 칸 월세방이라도 얻어 다시 살을 부딪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 시절 나의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 소원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졌지만 그 때의 불행했던 기억 이후 나의 행복한 것에 대한 관점은 당돌하게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일상의 소중함' 그것뿐이었다.
당연히 아내의 평수 큰 아파트에 대한 갈망까지는 내가 어찌할 수 없었던 바, 서울 생활 8년만에 아내의 욕심조차 뒤로 하고 시골로 올 수 있었지만 다행하게도 집에 대해서만큼은 아내 역시 그런 우여곡절 끝에 아주 단순한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무리하지 않는 경제와 가족에게 적절한 '형편에 맞는 집'.
럭셔리한 전원생활은 귀농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처지로서는 일생의 가장 열정적인 시간들을 돈을 벌기 위해 사투하며 지내야 할게 뻔했다. 기왕 사투할 바엔 시골에서 하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고 아내는 따라주었고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따라와야 했다.
몰론 럭셔리한 집을 짓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얼마 안 되는 귀농자금의 대부분을 집에 투자하는 것은 무리일 뿐만 아니라 무모한 일이었다. 시골의 일상도 그렇지만 시골집에 대한 부분 역시 사람에게는 충분히 환상을 심어줄 만한 소재다.
안타깝게도 그런 환상을 무리하게 실천하다 무모하게 쓰러져 간 사람들을 간혹 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은 현실이었고 생활이었다. 귀농자금의 대부분을 집에 투자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자금이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세 식구 사는 데 필요한 공간과 그에 맞는 적절한 자금여력을 판단했다. 내 손으로 집을 직접 지을 경우 비용은 아낄 수 있었지만 시간은 축내야 했다. 초기 시골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시골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근간(경제)을 만드는 것도 삶의 터전(집)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맡겼다. 집을 잘 짓는 사람에게. 순전히 나만의 경우이지만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내가 몇 주 혹은 몇 달 집 짓는 거 배워 와서 내가 직접 집을 지었다는 자부심 뒤에 남겨질 무수한 하자를 견딜 재간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러니까 집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하자가 있을 수 없는 먹고 사는 방식의 문제였다.
세 식구 살기에 충분한 10평짜리 언덕 위 작은 집
뜻하지 않은 '허가'라는 난제에 걸려 많은 시간을 다른 곳에서 기숙을 해야 했지만 그 시간 동안 그러니까 지난 6월 귀농 후 이사를 마친 12월 21일까지 꼬박 6개월 동안 말이다. 계란 배달과 노가다를 전전하며 부지확보 문제에서부터 주민들의 반대로 절치부심 해오던 유정란 농장을 만들었고 간판을 내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업자(?)에게 맡겨졌던 집이지만, 서울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작은 아파트 가격에도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가치의 집이지만, 우리 세 식구 편안하게 잠자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는 차고도 남음이 있는 이 집의 평수는 도시기준 10평이다.
그러나 10평짜리 집에 도시기준으로 거실과 주방과 별도의 방과 다락방이 두 개가 있고, 샤워실과 화장실과 다용도실까지 있다. 시골 기준으로 하자면 앞에 열거된 것들 외에 푸른 산과 너른 들과 별 총총한 하늘이 옵션으로 있는 마당도 있는 셈이다.
좀 과하게 풀어보자면 귀농 후 6개월만에 집도 짓고 먹고 살 걱정도 해결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는데 도대체 돈도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농장을 할 땅을 마련하고 시설을 만들고 닭들을 사서 넣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빌겠다. 경제공동체란 이름으로. 어쨌든,
맞춤한 집과 맞춤한 일거리를 모두 맞춰 놓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열심히 가꾸고 정착을 시켜 놓는 것이다. 그 또한 지금까지의 녹록치 않았던 과정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사 쉬운 일은 없는 법이다. 하여 각오하고 있는 바다. 더군다나 경험이 전무한 시골생활일진대.
그러나 저러나 곰곰 생각해보니 내가 사는 이 집이 모두들 동경해 마지않는 '언덕위에 하얀 집'이다. 속내야 어떻든 나도 어디 가서 자랑거리는 생긴 셈이다.
"어디 살아요?"
"시골에서 언덕 위에 하얀 집 짓고 삽니다."
"와~! 좋으시겠다. 그런데 몇 평짜리 집이에요?"
"음…."
서울 가서 자랑하기엔 평수가 문제이긴 하다.
이해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