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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관의 재배치를 끝낸 태종이 영사평부사 하륜과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를 가례색 제조(嘉禮色提調)로 삼고 국혼을 준비하라 명했다. 멀쩡한 왕비 민부인을 놔두고 새장가 들겠다는 것이다. 민부인의 투기에 맞서 정식 결혼으로 정면 돌파 하겠다는 뜻이다. 우선 예조(禮曹)로 하여금 고금의 비빈(妃嬪)제도를 연구 보고하라 명을 내렸다.

"제후(諸侯)는 9녀를 취하고 경(卿)과 대부(大夫)는 1처 2첩이며 선비(士)는 1처 1첩이었으나 혼례제도가 밝지 못하여 적(嫡)과 첩(妾)의 제한이 없어 많을 때는 정원수에 넘쳐 참란(僭亂)함에 이르렀고 적을 때는 정원수에 미달하여 후사가 끊김에 이르렀습니다."

새 장가 들고 싶다, 가례색은 뭣들 하느냐?

예조의 보고를 받아든 태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대부도 2첩이라니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 군왕에겐 9명이 정원이라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민부인의 눈치를 보며 궁녀를 취하던 일이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가례색 제조로 하여금 즉각 시행하라 명했다. 태종의 새장가 문제는 급물살을 타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제 택일만 남았다.

이에 반발하고 나선 이가 있었으니 영원부원군 민제였다. 태종 이방원의 장인이다. 아무리 사위와 장인 사이라 하지만 임금에게 직격탄을 날릴 수 없고 공격의 화살을 가례색제조로 있는 하륜에게 날렸다.

"온 나라 사람들이 하륜을 정도전에게 비유한다. 사람들이 하륜을 꺼려함이 이와 같은 즉 머지않아 환난을 당할 것이다."

저주에 가까운 비난이다. 하륜과 민제는 둘도 없는 사이였다. 왕재(王才)를 일찍이 알아본 하륜이 민제에게 접근하고 민제가 하륜을 밀어준 돈독한 관계였다. 하륜이 변방을 떠돌 때면 임지에 찾아가 글벗이 되어 주었고 하륜이 개경에 머무를 때는 민제를 찾아가 주안상 마주앉아 세상을 논했다.

이토록 좋았던 이들의 관계를 갈라놓은 것이 권력이다. 하륜이 임금의 오른팔이면 왕이 엇나가지 않게 직언해야지 권력에 취해 아첨한다는 것이다. 민제의 비판을 조호를 통하여 전해 들은 하륜은 담담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옛사람들도 바른 도리(直道)를 가지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행이 죽음을 면한 사람도 있소. 후인(後人)들의 평가가 있을 것이니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소?"

목숨은 두렵지 않으나 후대의 역사가 두렵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역사에 부끄럽지 않다는 뜻이다.

여자를 흔들어 놓기 위한 충격요법?

태종의 새장가 문제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상왕으로 물러나 있는 정종이 반대하고 나섰다. 태조 이성계가 왕도에 없는 상황에서 정종이 제일 어른이었다.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 하겠소?"

후사가 없는 자신도 새장가 문제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아들이 많은 아우는 무슨 새장가 같은 생각이냐는 질책이었다. 태종은 형 정종의 만류를 받아들여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라고 명했다. 태종의 새장가 문제는 후궁 권씨를 정의궁주(貞懿宮主)로 삼는 것으로 마무리 하고 없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정비 민부인에게는 충격이었다.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집착이 오히려 화가 되었다. 보고 싶지 않은 여자를 줄줄이 봐야 하는 현실이 도래할 수 있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왕비의 자리보다 여염집 아녀자의 자리가 더 좋았다. 태종은 어쩌면 여자의 가슴을 흔들어 주저앉히려는 전시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여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이 남자이고 그 상처를 치유해주는 것도 남자라 했던가. 민부인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태종이 유화의 신호를 보냈다. 민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 제(훗날양녕대군)를 원자로 삼고 왕비를 대동하고 처가를 방문하겠다는 것이다. 민부인으로서는 개인적으로 광영이고 가문의 영광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친정집을 왕을 신랑으로 앞세우고 돌아간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용수산 기슭에서 나비 잡으며 뛰놀던 소녀가 나라의 국모가 되어 옛집에 돌아간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기뻤다. 지아비가 속을 썩이지만 일단 기뻤다.

▲ 오늘날의 용수산 아래 마을. 멀리 보이는 것이 송악산이다. 북한화가 전시회가 열렸던 밀알미술관에서 서순철의 작품을 촬영했다.
ⓒ 이정근
개경의 진산이 송악이라면 안산은 용수산이다. 북쪽의 송악산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외스러운 산이라면 남쪽의 용수산은 뭐든지 받아 줄 것 같은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산이다. 개경의 중심 번화가 십자로에서 연복사를 지나 회빈문으로 가다보면 민제의 집이 있다. 개경바닥에 흔한 대감댁이 아니라 왕의 처갓집이다.

여흥부원군 민제의 집에 왕이 베푸는 잔치가 벌어졌다. 태종은 북벽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민제는 동벽에 앉았다. 사사로이는 장인과 사위이지만 군신의 예다. 민제의 매부 의정부찬성사 곽추, 민제의 처제부 개성유후 송제대, 민제의 아우 승녕부윤 민양은 모두 남쪽에 앉았다. 신하의 품계에 따른 자리다. 민무구와 민무질은 멀찌감치 앉았다.

산해진미로 준비한 진수성찬이 차려지고 성악(盛樂)이 울려 퍼졌다. 용수산 자락에 집이 들어선 이래 최대의 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민제가 태종에게 잔을 올렸다. 태종이 잔을 비우고 민제에게 술을 내렸다. 사가에서는 사위가 장인에게 먼저 술을 올리는 것이 예의이지만 오늘의 잔치는 군신과의 관계다.

허리를 꺾은 민제가 술잔을 받았다. 황공한 마음이었다. 용상에 오른 사위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술잔을 내린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하늘 아래 제일 광영스러운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황송한 모습으로 술잔을 받은 민제는 자신을 그윽이 바라보는 태종 이방원의 시선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왕비 민부인은 안에서 여러 택주를 거느리고 어머니 송씨를 위한 연회를 베풀었다. 사적으로는 모두가 숙모에 고모, 이모이지만 민부인은 국모다. 감히 얼굴을 들어 바라볼 수 없는 관계이지만 민부인은 편안하게 대했다. 스스럼없이 어렸을 적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함박웃음이 터졌다.

20여 년 전, 잘 나가던 대감댁에서 동북면 촌뜨기를 사위로 맞아들인다고 수군대던 동네 사람들은 감히 잔치 마당에 들어올 수 도 없었다. 나라의 지존 임금이 있기 때문이다. 대감댁 주변을 호군들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네 사람들은 질시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동네의 경사로 받아들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처녀가 왕비가 되어 금의환향 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용수산 골짜기가 떠들썩한 잔치

처갓집을 방문하여 잔치를 베풀어주고 궁으로 돌아온 태종 이방원에게 국경에서 급보가 날아들었다.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최유경이 국경을 넘어 의주에 도착 즉시 올린 장계(狀啓)였다.

"연병(燕兵)의 공격으로 황도(皇都)가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연병이 먼 곳까지 달려와 싸우는데 황제의 군대는 싸우면 반드시 패하고 있습니다. 제병(帝兵)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기세가 약하여 연전연패하고 있습니다. 연병의 위세에 천하가 소연합니다."

대륙이 요동치고 있다는 얘기다. 북경의 야심가 연왕(燕王) 군대가 명나라의 수도 남경을 공략하여 황군(皇軍)이 지리멸렬 패주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다. 상국으로 받드는 대륙의 맹주 명나라 군대가 쫓기고 있다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자로 모시는 황제가 위태롭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국왕 태종은 난감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죽자 세자시절 사망한 의문태자의 아들 혜제가 건문제로 등극했지만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건문제의 심복 황자징과 방효유가 분봉을 삭감하는 강경책을 펼쳤으나 이것이 오히려 화를 불러왔다. 북경에 아성을 구축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연왕(燕王)이 명나라의 수도 남경을 공격한 것이다.

대륙이 요동치면 한반도가 흔들린다. 명나라가 흔들리면 조선은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명나라에 충성할 것인가? 연왕에게 충성할 것인가? 명나라의 권지국 조선은 비상사태다.

#가례색#정의궁주#제후#경#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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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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