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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논으로 변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
 지금은 논으로 변한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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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광화문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가 펄럭였다. 그와 동시에 519년 동안 이어져 오던 조선왕조가 망했다. 하지만 뜻있는 우리 독립지사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광복의 뜻을 품고 국외독립기지를 물색했다.

1911년 봄, 독립지사 가운데 이회영·이시영·이동녕·이상룡·김동삼 등은 수십 명의 가족과 친지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지린성 류허현 삼원보에 이르렀다. 이분들은 먼저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이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확대·개편됐다.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배출됐다.

우리 답사단 일행(안동MBC특별취재반)은 단둥에서 압록강을 취재하다가 중국 공안에게 여권을 빼앗겨 불행 중 다행으로 그날 오후 늦게야 돌려받았다(관련기사 : 압록강변서 중국공안에 여권을 압수당하다). 원래는 오전 10시께 출발하면서 옛 조상들이 밟았던 피눈물의 망명길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지만, 뜻밖에 공안에게 걸려 여의치 못했다.

그날 저물녘에 출발해 이튿날(2004년 5월 27일) 오전 2시에야 길림성 통화에 도착했다. 한 빈관에서 단잠을 자고 난 뒤 우리 일행은 한 방에 모여 일정을 상의했다. 그 결과 답사는 두 팀으로 나뉘어 한 팀은 관광 목적에 맞게 통화 시내를 두루 돌다가 점심 식사 후 매화구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른 한 팀은 현지 택시를 빌려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단동의 공안이 통화로 연락했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나는 답사팀에 속했다. 택시는 험한 산길을 한참 달린 끝에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광화(光華)'에 이르렀다. 거기서 20여 분 더 달리자 마침내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옛터가 나왔다.

광화진 들머리의 문루
 광화진 들머리의 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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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하 신흥무관학교

독립지사들이 삼원포 추가가에 세운 신흥강습소가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확대·발전했다. 그리하여 유하현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둬 고급 간부를 양성했다. 통화현 합니하·칠도구·괘대모자 등에는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둬 초등군사반을 편성해 3개월간의 일반 훈련과 6개월간의 후보 훈련을 담당케 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고산자 고등군사반의 초대 학장에는 이시영,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김창환, 교성대장 이청천, 교관 오광선·신팔균·이범석·김광서·성준용·원병상·박장섭·김성로·계용보, 의무감 안사영 등이 있었다. 또 합니하 초등군사반의 교장에는 이장녕, 학도대장 성준용, 교관 박두희·오광선·이범석·홍종락·홍종린 등이 있었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조선의 뜻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꿈의 동산이었다. 많은 이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수륙만리 이곳까지 찾아왔다.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다니면서 혁명가의 꿈을 키웠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아주 신중한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겨우 15살밖에 안된 꼬마였던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입학자격 최저 연령이 18살이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서 엉엉 울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내 기나긴 순례 여행의 모든 이야기가 알려지게 되자, 학교 측은 나를 예외로 대우하여 시험을 칠 수 있게 했다. 지리·수학·국어에서는 합격하였지만, 국사와 엄격한 신체검사에서는 떨어졌다. 다행히 3개월 코스에 입학하도록 허락받았고 수업료도 면제받았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학생들 말로는 이제까지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고 하였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른바 게릴라 전술 훈련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등산에는 오래 전부터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학우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다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날'을 위해 조선의 지세, 특히 북조선의 지리에 관해서는 주의 깊게 연구하였다.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얼마간의 훈련을 받고 나자, 나도 힘든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으며, 그러자 훈련이 즐거워졌다. 봄이면 산이 매우 아름다웠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에 넘쳐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할쏘냐?(님 웨일즈 <아리랑> 중에서)

지난날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를 안내자 이국성(왼쪽) 씨에게 고증해주는 현지 호로 함수림(오른쪽)씨
 지난날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를 안내자 이국성(왼쪽) 씨에게 고증해주는 현지 호로 함수림(오른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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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하 건너편 언덕 위의 동네는 지금도 '고려촌'(高麗村)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금의 행정상 명칭은 '광화칠대(光華七隊)'였다. 이 마을의 밭은 생도들이 농사지었던 둔전이요, 이 마을의 집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관들과 가족들이 거처하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마을 호로 함수림(咸樹林·51)씨가 소달구지를 몰고 가다가 지난날을 증언해줬다.

안내자 이국성씨는 몇 해 전에 이곳 동포들이 성금을 모아서 이곳에다가 '신흥무관학교 옛터'라는 돌비석을 세웠지만, 이곳 인민정부에서 돌비석을 깨트려 연못에 빠트려버렸다고 전했다. 그 사이 한 세기가 지나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다행히 우리 일행에게는 역사의 현장을 증언해 줄 사람이 있어서 이곳을 찾았지만, 이분들도 모두 다 떠난다면 누가 이 산하를 '합니하 신흥무관학교'라고 전해줄까?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옥수수 싹이 돋아나고 있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터로 옥수수 싹이 돋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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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이튿날 매화구에서 고산자 신흥무관학교에 가려고 고속도로에서 좁은 들길로 빠졌다. 모내기철이라 농부들은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30~40년 전처럼 모내기를 손으로 하고 있었다. 들판에 사람들이 백로떼처럼 많았다. 이 만주 땅에 벼농사를 전파한 이도, 이곳 불모지에 논과 수로를 만든 이는 우리 조상이었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자 MBC촬영 팀은 그곳 모내기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차를 세웠다.

10여 분 차를 세워두면서 모내기 장면을 스케치하고 다시 차를 타고 달리는데, 앞뒤를 두리번거리던 안동문화방송 권순태 PD가 '3XXX 차 번호를 단 빨간색 승용차가 계속 우리의 뒤를 따라온다'고 전했다. 차창으로 보니까 우리가 달리면 뒤따라오고, 우리가 서면 그 자리에 서곤 했다. 자세히 살피자 한 대가 아니고 두 대가 우리의 뒤를 쫓았다. 다른 한 차는 하얀 색이었다. 차에는 선글라스를 쓴 두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국성씨가 '저들은 중국 공안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개구리 노는 곳에 뱀이 어슬렁거리며 노려보듯 몹시 우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우리는 용변도 볼 겸 시험 삼아 차를 세웠다. 그들도 그 자리에 섰다. 고산자에 가까이 이르자 그들은 우리의 행선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얀 차가 우리를 앞질렀다. 우리 답사단은 긴장할 수밖에. 그들은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고 계속 100~200미터 정도 간격을 두고 앞뒤에서 감시만 했다. 기관원들이 미행·감시한다는 게 얼마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짧은 시간이나마 실감했다.

만주의 벼논들, 대부분 우리 조상들이 논으로 개간하였다.
 만주의 벼논들, 대부분 우리 조상들이 논으로 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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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당시 사형수 김대중의 막내아들 김홍걸씨가 "선생님, 저희 집은 정보부에서 감시하기에 대문을 열어둬도 도둑이 얼씬도 안해요"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얘기를 했더니, 일행들은 정말 그랬을 것 같다고 화답했다.

마침내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터에 이르렀다. 이곳은 신흥무관학교 2년제 고등군사반이 있었던 곳. 나는 1999년 이항증 선생과 함께 김중생(일송 김동삼 손자) 선생의 안내로 이곳을 다녀간 바 있기에 5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그새 5년이 지났지만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다만 그때는 한여름이라 논에는 벼들이 한창 이삭이 패었고 옥수수가 자라 한 길이 넘었는데, 지금은 파종한 지 얼마 안 된 듯 파릇파릇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동행한 김시준 선생의 조부는 신흥무관학교 김규식 교관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생도 김성로 선생이었다. 이항증 선생은 조상 3대가 이 학교와 관련이 있다. 김 선생은 여기가 바로 신흥무관학교 자리라고 하면서 금세 눈물을 쏟았다. 남의 땅에서 온갖 설움 속에 풍찬노숙하면서 독립 운동하셨던 할아버지·아버지가 떠올라서 흘리는 눈물일 게다.

할아버지·아버지가 다녔던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눈물짓는 김시준 선생(왼쪽), 3대가 관여한 신흥무관학교 앞에서 지난날을 더듬는 이항증(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
 할아버지·아버지가 다녔던 신흥무관학교 옛터에서 눈물짓는 김시준 선생(왼쪽), 3대가 관여한 신흥무관학교 앞에서 지난날을 더듬는 이항증(현 광복회 경북지부장)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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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을 들판, 마을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느라 바빴다. 그런 가운데 두 대의 중국공안 감시차는 망원경으로 우리 일행의 행동을 계속 감시했다. 나는 답사하는 동안 내도록 머리칼이 주뼛주뼛했다. 하지만 100년 전 우리 독립지사들은 이보다 더 심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일제와 맞섰을 것이다. 


태그:#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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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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