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은 순정한 학구파인가 하면 치열한 현실비판과 뜨거운 제자 사랑으로 학인의 길을 걸은 남다른 분이다. 그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독습으로 학문의 일가를 이루었다. 화담 서경덕이 "어진 스승을 만나지 못해서 공부에 헛힘을 많이 썼다."(不得賢師旺費工夫)라 했던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흔히 조선시대에 학자로서 고봉에 이르고 당세와 후세에 이르러 학맥(학파)을 이룬 경우는 이황의 퇴계학, 이이의 율곡학, 정약용의 다산학과 함께 조식의 남명학을 든다.
높고 깊은 '남명학'의 탐사에는 선학들의 성과물이 쌓여 있다. 여기서는 이를 바탕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남명집> < 언행초록> 등에 나타난 남명의 학문관이다.
"선생이 말하기를 학(學)은 반드시 자득을 귀히 여긴다. 책자만 의존해서 의리를 강명하고 실득(實得)이 없으면, 끝내 수용을 보지 못한다. 학자는 능언(能言)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
"널리 경전에서 구하고 백가(百家)의 학설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 잡다한 것들을 거둬들이고 간이한 것으로 나아가서, 스스로 돌이켜보고 간략하게 만들어 일가(一家)의 학문을 이루었다."
"음양·지리·의약·도가의 설에 이르기까지 그 대강을 모두 알고 계셨다. 그리고 궁술과 마술·진법·방어·진(鎭) 등에 유념하여 연구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 재질이 뛰어나고 뜻이 굳건했으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요즘 학자들은 절실하고 가까운 것을 버리고 고원한 것을 추구한다. 학문은 처음부터 사친(事親)·경형(敬兄)·제장(悌長)·자효(慈孝)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것에 힘쓰지 않고 급거에 성명의 오묘함을 연구하려고 하니, 이를 인간사에서 천리를 구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결국 마음에서 실제로 체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깊이 경계할 만하다."
"인간사를 저버리고 천리를 논하는 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리(理)이며, 자신을 되돌아 보지 않으면서 박식한 것은 귀로만 하는 학문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아래로 일상사를 배우고 위로 천리를 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탐구함으로써 장차 실용을 이루고, 자기 몸을 수양함으로써 장차 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리를 탐구하는 방법의 바탕은 독서·강론하여 의리를 밝히는 것, 구체적 일에 대응하여 적합한 상태를 구하는 것이다. 몸을 수양하는 방법의 요점은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다."
"이치를 탐구하고 몸을 수양하며 마음을 보존시키고 성찰하는 방법의 노력은 반드시 '경'을 위주로 한다. 독실하게 배우고 노력하며,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가는 것은 곧 '경'에서 시작하여 '의'로서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이다. '경의'는 학자들이 자신의 마음 안과 마음 밖의 두 측면에서 해야 할 공부인데, 이는 '경'으로서 마음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마음 밖을 바르게 한다."
남명이 끼친 학문의 방법과 관련한 연구자의 분석이다.
(1) 조식은 말을 적게 하고 글을 아껴 쓴 분이다. 문집의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다. 길게 늘어지는 논(論)이나 설(說)은 피하고, 몇 자 되지 않는 명(銘)에다 이치의 근본을 간추리는 데 힘쓴 것이 조식 글쓰기의 남다른 점이다.
(2) 조식은 스스로 실행하는 바도 없는 주제에 말로만 대단한 이치를 논하면서 헛된 이름을 얻는 것을 경계하였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있는 이황이 그런 폐단을 막지 않고 방치한다고 나무라는 편지를 쓴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자기가 깨달아 알지 못하는 기존의 논의를 행세차로 늘어놓으면 그렇게 된다. 작은 의문이라도 소중하게 여겨 분명하게 따져 확고한 해답을 얻어야 학문을 시작할 수 있다.
(3) 조식은 경학을 하지 않은 점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진리는 경건에 있어 계속 받들 면서 공부해야 하고, 경전을 풀이해 진리를 밝히는 일을 자기 혼자 잘 한다고 뽐내면서 시비를 벌이고 남들을 나무라곤 하는 풍조에서 일찍 벗어난 것이 참으로 주목할 일이다. (주석 1)
남명(학) 연구에 크게 기여한 김충열은 그의 학문이 "관념적이라기 보다 행동적이고 실용적 이었다"고 분석한다.
선생의 학문은 그 형성 과정에서 네 차례의 큰 전환이 있었기에 조선조 대다수의 성리학자들과는 달리 시야가 넓고 배타적이지 않았다. 선생은 소년기에는 일반 사대부의 자제들처럼 <소학>을 익히고 육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아울러 <춘추좌씨전>과 유종원의 작품을 좋아하고 천문, 지리, 의학, 수학, 병진(兵陣) 등 여러 면의 지식과 기예를 익히고 닦아 한때는 그 자신도 자부심이 대단하여 일반을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선생의 학문은 청년기에 이미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고, 현실에서의 실천을 표방했기 때문에 관념적이라기보다 행동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기를 앞세우는 학문이 자칫 빠지기 쉬운 현실과의 타협은 전혀 없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높은 뜻과 기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노자와 장자를 연구하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었다. (주석 2)
주석
1> 조동일, <조식의 시문에 나타난 지리산의 의미>,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 논문자료집>, 77~78쪽.
2> 김충열,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 94쪽, 예문서원, 200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진짜 선비 남명 조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