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지니고 예술정신 꽃피운 고흐와 고갱

[이미지 산책 3] <오르세미술관전> 3

등록 2007.08.25 09:24수정 2007.08.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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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반 고흐의 방', 빈센트 반 고흐, 1889년, 57.5 x 74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Hervé Lewandowski

고흐의 방을 봅니다.

지금도 아를에 이 고흐의 방이 이대로 보존되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참 화사합니다. 강렬한 원색이 적절히 사용되어, 방 안의 사물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존재를 뽐낼 수 있게 합니다. 짙은 녹색의 창, 빨간 이불, 푸른 문, 고동색 침대와 탁자 등이 고른 색채로 분배되어 있습니다. 벽과 침대에 가느다란 짧은 하얀 선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판화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방 주인은 자신이 없는 방 안을 혼령처럼 쳐다봅니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은 주인이 방을 비우고 그림을 그리러 나갔음을 나타냅니다. 살짝 열린 환한 창은 따뜻한 여름날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후,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에 반해 아침마다 산책을 하곤 했습니다. 남부의 강렬한 햇빛이 고흐를 자극합니다. 창작 의욕이 샘솟습니다. 아를에 머문 10개월 동안, 그러니까 1888년 2월부터 12월까지 100여 점의 유화를 그리는데 모두 대표작들이 됩니다.

그림 속 많은 사물들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양쪽 끝의 문, 두 개의 베개, 두 개의 의자, 두 짝의 창문, 두 개의 초상화 등. 그건 고흐의 외로움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고갱을 생각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고흐는 왜 '아를의 방'을 3개 그렸을까?

이 방은 아를에서 주거를 위해 새로 찾아낸 건물에 있는 방이었습니다. 그 유명한 '노란 집' 말입니다. 고흐는 이 해 10월 말부터 고갱과 2개월 정도 같이 지냈는데, 그렇다고 같은 방을 쓴 것은 아닙니다. 고흐는 방을 몇 개 빌리고 고갱을 초대했습니다. 다른 화가도 초대해 일종의 화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은 고흐가 고갱과 비극적인 이별을 하고 나서, 요양원에 치료를 받고 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곧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고흐가 이 '아를의 방' 그림을 세 개 그렸다는 것입니다. 자료 조사 중 같은 그림에 대해서 다른 설명이 언급되어 이상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서로 다른 그림을 가지고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도 많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아를의 방 그림은 고갱이 아를에 오기 일주일 전 설레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고갱이 온다는 설렘도 있었고, 처음으로 '자기만의 방'을 가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영감이 떠올리게 하는 고장에서 갖게 된 멋진 '자기만의 방'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 있습니다.

고갱이 왔지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직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한 고흐에게 고갱은 충고를 해댑니다. 그래서인지 고흐는 자기 본래에서 조금씩 벗어난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그건 고흐에게 불행한 일이 되었고요. 다행이지만 사실 대부분의 고흐의 명작들은 고갱이 오기 전에 완성됩니다. 그 유명한 '해바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흐 그림과 마음 속에만 존재한 아를의 '노란 집'

1888년 12월, 무슨 마음의 심경이 고흐로 하여금 자신의 귀를 자르게 했는지 모르지만(사실은 귓밥을 잘랐을 뿐이랍니다), 당시 고흐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고갱에게 화가 나 있었고, 친구들은 일 때문에 아를을 떠나갔고, 동생 테오는 약혼을 한 상태였습니다. 고흐는 외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건은 터지고 고갱은 바로 떠나 버립니다. 고흐는 아를의 병원을 거쳐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집니다.

지금 <오르세미술관전>에 전시되고 있는 그림은 '아를의 방' 그림 중 세 번째 그림인데, 그러니까 요양원에서 나온 후의 그림입니다. 아마 고흐는 이 그림 속 방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병원에 들어간 것도 주민들의 신고로 인한 것이었고, 그 후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방 그림은 아마도 첫 번째로 그렸던 그림을 보면서 재구성한 것일 것입니다. 소위 복제화입니다. 첫 번째 그림을 책에서 봤는데, 위의 그림이 훨씬 정갈합니다. '오르세미술관전' 도록에 이 그림에 대한 고흐의 고백이 나오네요.

"나는 흐린 남보라색 벽과 금이 가고 생기 없어 보이는 붉은색 바닥, 적색이 감도는 노란색 의자와 침대, 매우 밝은 연두색 베개와 침대 시트, 진한 빨강의 침대 커버, 오렌지색 탁자, 푸른색 대야, 녹색 창문과 같은 다양한 색조를 통해 절대적인 휴식을 표현하고 싶었다."

주인이 없는 방을 통해 휴식을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휴식이 되는 그런 그림말입니다. 그 휴식은 사실 고흐가 취하고 싶었던 휴식이었겠고요.

참! 고흐의 이 '아를의 방', 고흐 자신만의 방이 있던 그 '노란 집'은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지고 지금은 풀밭만 남아 있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은 실제의 고흐의 방의 모습과 색깔은 아닐 것입니다. 고흐의 마음속에만 그리고 이렇게 그림으로만 존재하는 방입니다.

고흐와 고갱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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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화가의 자화상', 폴 고갱, 1890-1891년, 38 x 46 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René-Gabriel Ojéda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고갱이 타히티로 가서 눌러 앉아 살면서 그곳 여인들의 모습을 화폭에 가득 담기 전에, 그가 주로 화가로서 활동하던 곳은 브르타뉴 지방입니다. 브르타뉴 지방은 프랑스 북서쪽 끝에 반도처럼 튀어나온 곳을 말합니다. 이 지방 해변가에 위치한 퐁타방이란 곳에서 3년 정도 머뭅니다.

고흐와 고갱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직업을 갖고 살다가 화가로서의 삶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전의 습작 기간은 빼고요. 그리고 둘 다 파리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생전에 그다지 인정을 못 받았다는 점까지 비슷합니다.

고갱은 35세 때 주식 중매인에서 화가로 전업합니다. 몇 년이 지나, 파리를 떠나 이곳 그림 같은 시장 도시 퐁타방에 반해 동료 화가들과 머뭅니다. 여기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이 그림 뒤에 보이는 그림 '황색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고갱은 방에서 거울에 반사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의 '황색 그리스도' 그림의 좌우가 뒤바뀌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퐁타방 근처에 있는 트레말로 성당 안에 있는, 나무로 된 십자가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브르타뉴 주변의 가을 들판처럼 황색으로 그려져 있고, 이 그림에는 안 나오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들이 브르타뉴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합니다. 그리스도가 브르타뉴의 농부처럼 그려졌다고 해서요.

그러나 이 '황색 그리스도' 와 '자화상'은 이곳 퐁타방에서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고갱은 친구와의 불화가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관광지처럼 번잡해진 퐁타방을 떠나 근처 르 풀뒤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마치 우리나라 화가 장욱진이 온천 개발로 번잡해진 수안보 화실을 떠나 용인으로 옮긴 것처럼요.

그리고 이 곳에서 이 그림들을 완성합니다. 이 '자화상'은 타이티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기만의 방' 가진 고흐와 고갱

이곳 르 풀뒤에서 마리 앙리 여관이라는 곳에 동료들과 머무는데, 이 당시의 여관이라는 개념은 우리나라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입니다. 바르비종 화가들이 머문 여관도 그렇고, 일종의 문화촌 개념으로 활용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고흐나 고갱은 '자기 집'이 없었고 단지 '자기 방'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좋게 말하면 아틀리에가 될 수도 있겠지요. 풍경 그림을 많이 그린 두 사람이야 야외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겠지만 그래도 완성은 자기만의 '아틀리에'에서 했을 것입니다.

아틀리에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동화집 <나무가 되고 싶은 화가 박수근>에 나오는 박수근의 '쪽마루 아틀리에' 사진이 그것입니다. 방과 방 사이의 쪽마루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뒤로 하고 가족과 찍은 사진입니다. 덩치 큰 박수근이 한 가운데 앉아 있고요. 아하! 그러고 보니 이 사진을 그리면 고갱과 같은 자화상이 되겠군요. 자신의 작품 앞에 있는 화가의 모습이라!

박수근은 미군 부대에서 부지런히 일한(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덕분에 조그마한 집을 장만할 수 있었고 난생 처음 '아틀리에'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50~60년대 그림 그리는 모습이 얼마나 신기했을까 싶은데, 담 너머 이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동네 사람들이 보곤 했답니다. 어쨌든 박수근에겐 '자기만의 방'이었습니다.

자꾸 이야기가 따른 데로 새는데, 자신의 방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는 작가로 조경란이 있습니다. 자신의 첫 소설 <식빵 굽는 시간>을 쓴 그 좁아터진 옥탑방 이야기를, 제가 보라색 사인펜 밑줄 그으며 읽은 <조경란의 악어이야기>를 보면 접할 수 있습니다.

그 방 이야기를 조경란이 2004년에 신문 칼럼에도 썼는데 '자기만의 방'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칼럼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그 누렇게 바랜 신문 칼럼 조각이 제 방 책상 위에 지금도 붙어 있습니다.

그 좁아터진 방 구석에 쌓아올려 놓은 책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경험, 그래서 책을 밟고 지나갈 정도가 된 충격적인 경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책들을 정리하면서 작가는 깨닫습니다.

"여기 나는 이 좁은 방에 있지만, 나는 '문학'과 함께 그 크기를 잴 수 없는 무한한 공간인 내 '머릿속'에 있다. 여기가 나의 '방'이고, 이것은 나 자신을 성찰하는 방이며, 창조의 신비한 공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머릿속'이라는 무한하게 커다란 방을 찾았고, 그래서 비좁은 현실의 방에서 만족스럽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치열한 예술정신을 꽃피어 나간 화가들

다시 고갱으로 돌아갑니다. '자화상' 오른쪽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고갱이 만든, 담배 넣는 항아리인 '괴물 형상을 한 폴 고갱의 초상'입니다. 도기에도 손을 댔던 거지요. 여기에 보들레르 같은 상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악마주의적 소재를 고갱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성과 악마성 가운데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과 오른쪽 항아리는 왼쪽의 그림에 대조적으로 어둡습니다. 그건 자신의 마음 속 모습과 갈등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자신의 방에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배치해 놓았다기보다는 자화상을 위한 의도적인 구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고갱의 얼굴에 작은 빛이 머물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두 가지 요소는 다 있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상징주의자들이나 고갱 같은 이가 악마성의 모습을 작품 속에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권위적이고 타락한, 그러니까 본래의 참 모습에서 벗어난 종교의 모습에 반발해서 형상화했다는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고갱의 표정을 보면 진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냘픈 그리스도의 몸에 비해 덩치 큰 모습으로 자신을 그린 것은 인간적인 자신의 욕망을 은유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죄스러워 하는….

고흐의 방과 고갱의 방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흐의 방, 어느 정도 자유로운 사조로 살았고 원시주의적인 것에 경도되었기에 어느 정도는 거칠었을 고갱의 방.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파리에 넉넉한 공간의 아틀리에를 지니고 있어 동료들까지 같이 사용하게 한 바지유라는 화가에 비해 이 두 화가는 정말 작지만 '자기만의 방'을 지니고 치열한 예술정신을 꽃피어 나간 화가들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시기는 고흐와 비참한 결과로 헤어진 후이고, 그림의 완성은 고흐가 죽은 후입니다. 고갱의 마음에 고흐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있었을 테이고 혹시 이 '자화상'에 그런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고갱과 고흐가 아를에서 같이 생활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고흐가 자해를 하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혹시 모르지요, 고갱이 타이티로 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프랑스 어느 지방의 가난한 아틀리에에서 계속 그림을 그려나갔을 것입니다.

집과 달리 '방'이라는 단어는 정겹습니다. '집'은 소유의 개념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방'은 얼마든지 소유해도 되는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고흐처럼 없는 돈 털어내며 방세를 낸다 하더라도, 방에 머무는 그 순간만은 온전히 '자기만의 방'입니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더욱 멋지게 꾸밀 수 있고요.

그건 이 나라 구석구석에 자신만의 좁아터진 아틀리에에서, 그것도 모자라 공동 화실을 사용하는, 수많은 '고흐'와 '고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남의 멋진 집, 멋진 방, 멋진 정원을 보면 <월든>의 소로처럼 어느 시인의 말을 따라 마음속으로 소리쳐볼 일입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임금이니 그 권리를 시비할 사람, 아무도 없도다."

덧붙이는 글 |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덧붙이는 글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고흐 #고갱 #아를의 방 #오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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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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