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월항쟁 당시 시신을 촬영한 사진. 번호가 24번까지 매겨져 있어 당시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대구 10월항장 유족회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는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에는 거리 한쪽에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들이 엄폐물 뒤에 쪼그려 앉아 있고 반대편으로 피신한 시위 군중 쪽에는 여러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 시신을 촬영한 사진에는 번호가 24번까지 매겨져 있어 당시 적어도 24명이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한 경찰은 "1946년 10월 1일 출동명령을 받고 대구역 앞으로 진압을 나가 철야를 했다. 현장에서 경찰 지휘관이 검지를 하늘을 향해 치켜들면서 손가락으로 지시하면 졸병들은 명령에 따라 총을 한 발씩 발사했다"고 증언했다.
대구경찰서 점령 소식이 퍼지자 시내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군중들은 경찰지서와 사택을 공격하고 경찰과 우익인사, 군정관리 30여 명을 살해했다. 최문식, 이재복 등 좌익 지도자 일부는 자제를 요청하는 방송을 했으나, 이미 통제 불가능이었다. 그러나 이일재(당시 화학노조 서기)의 증언에 의하면, 일부 마을에서는 청년들이 자치회를 만들어 질서를 잡고 관공리와 부유한 인사들의 집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빈민들에게 배급하기도 했다.
2일 오후 3시, 미 전술군은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워 대구 시내로 들어왔다. 오후 5시에는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들은 장갑차를 시내 곳곳에 배치하고 군중들에게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으며, 이에 일부는 장갑차 앞에 누워 저항했다.
충청도 등 다른 지방에서 온 경찰도 투입됐는데, 그들은 5명씩 조를 짜 길거리나 민가를 수색하며 눈에 띄는 청장년 남성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특히 미군정 반대자가 많았던 남산동의 남산국민학교 인근 마을, 덕산국민학교 윗마을, 자갈마당 주위 마을 등을 주로 수색하여 청년들을 연행했다. 연행한 사람들은 경찰서나 수창국민학교 운동장 등에 수용했고 불응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번져 나가는 항쟁... 민간인 학살은 계속됐다대구에서 밀려난 시위대는 시 외곽으로 나가 경북 각 군의 농민들과 합세했다. 1946년 초부터 경주, 왜관, 의성, 현풍 등에서 식량공출을 둘러싸고 농민들이 시위와 폭동을 일으켰다. 1946년 한 해 동안만 1552건의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도 했다. 경북 전역으로 확대된 항쟁은 몇몇 지역에서는 대구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미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였으므로 진압 또한 훨씬 더 강경했고 많은 민간인이 학살됐다.
[경북 칠곡] 칠곡에서는 1946년 10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에 대구에서 온 시위대와 지역 농민들이 여러 지서들을 습격하고 경찰 3명을 살해했다. 이어 왜관읍 북쪽의 교량 2개를 폭파했으며, 경찰·관리·부호의 가옥을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군중 7명도 사망했다. 각 면을 돌면서 약 2000명으로 불어난 군중은 3일 오전 6시경 왜관읍에 도착, 시위행진을 하고 칠곡경찰서를 공격, 6명의 경찰을 살해하고 경찰서를 점거했다. 이 봉기는 이튿날 왜관읍으로 들어온 충남경찰부대가 진압했다.
이튿날 4일 새벽, 칠곡경찰서를 점거한 시위대들은 경찰이 오는 것을 알고 도피했으나 경찰서 부근에는 비무장한 주민들이 많았다. 1946년 10월 3일은 음력으로 9월 9일 중양절이었는데 당시에는 식량 사정 때문에 추석에 미처 차례를 지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 날 차례를 지냈다. 주민들은 이 날 밤 왜관읍 왜관동 곳곳에 모여 차례를 지내거나 문중 모임을 한 뒤, 총소리가 들리자 귀가하지 못하고 칠곡군의 중심가였던 경찰서 부근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다가 경찰이 발포하자 흩어졌는데, 이 때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 수십 명이 사살됐다. 특히 왜관읍 왜관동 주민들이 다수 살해돼 지금도 이 지역에는 음력 9월 9일에 제사 지내는 집이 많으며, 남자들이 많이 죽어 사건 직후에는 농사일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4일 오후에는 칠곡군 약목면 동안동 주민 11명이 토벌을 나온 충남경찰부대 경찰에게 사살됐다. 그 전날 약목면 주민들은 약목지서를 습격했다. 이후 1개 대대병력으로 추정되는 경찰들이 이 마을을 포위해 들어왔다. 이에 여성과 노약자는 집안에 숨고 남성들은 도피하다가 논으로 달려가 추수를 앞둔 벼 사이에 숨었다. 그러자 경찰은 논을 포위하고 숨어 있던 사람들에게 일어서면 살려준다고 명령한 뒤, 일어선 주민 11명을 사살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40~50대 남성이었다.
[경북 영천] 영천에서는 10월 3일 오전 1시경 수만 명의 주민들이 봉기해 읍내를 포위, 통신망을 절단하고 군청, 경찰서,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출장소 등과 지서,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불태웠다. 한민당의 요인이자 악질지주로 악명이 높았던 이인석의 집도 공격을 받았다. 군수 이태수를 포함해 경찰과 관리 16명이 살해되고 이 와중에 주민 24명도 사망했다. 봉기는 금호, 신녕, 청통, 임고, 화북면 등 면 단위에서도 격렬하게 일어나 영천 전역을 휩쓸었다.
영천의 봉기는 5일 대구에 주둔하던 미군과 충남경찰대 등 지원경찰이 들어와 진압했다. 이후 12월 8일까지 사건 관련자 600여 명이 경찰에 검거됐으며 이 가운데 9명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처리와는 별도로 충남경찰부대와 서북청년단이 주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거나 연행한 사람을 취조하면서 무차별 구타해 상당수의 민간인이 살해됐다. 특히 화북면에서는 주민 6명이 화북면 자천리 오리장림(현 자천중학교 운동장) 등지에서 사살됐고, 화북면 정각동 추곡마을에도 군경이 들어와 주민들을 사살하고 마을 10여 가구의 집을 모두 불태웠다.
진실위 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선산 지역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났다. 박상희는 일제 때 좌우 합작 항일단체인 신간회의 선산지회 간부를 지냈고 해방 후 인민위원회 간부를 지낸 이 지역의 명망가였다. 그는 10월 3일, 2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구미경찰서를 습격했다. 그는 협상으로 경찰들을 철수시킨 뒤 경찰서 간판을 떼어내고 선산인민위원회 보안서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장을 비롯한 경찰관들과 우익정당 요인들을 유치장에 가뒀다. 선산군의 항쟁은 10월 6일 대구에서 온 경기도 지원경찰대에 의해 진압됐다. 박상희를 비롯한 주동자 3명은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논바닥에서 사살됐다.
이외에도 달성, 성주, 의성, 군위, 경주 등 경북의 19개 군에서 항쟁이 발생했으며,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위의 지역과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1946년에 시작된 학살, '연좌제'로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