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안에서 들은 끌려가던 북한사람 이야기

평화도 인권도 필요한 딜레마

등록 2001.06.04 18:00수정 2001.06.0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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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자꾸만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항에서 '암달러' 장사에게 중국 돈을 대충 환전하여 텐진 가는 배를 탔다. 도크를 나선 배는 안개 사이로 누워 있는 섬들 사이를 헤집고 나가 대해로 접어들었다. 그제부터 스물 몇 시간을 가면 외국말 쓰는 사람들의 나라인 것이었다.

내 손에 들린 표는 삼등 선실표. 2인 1실이 일등표, 4인 1실은 이등표, 그러나 삼등표는 8인 1실이 아니라 그 나머지 사람이 한데 얽혀 앉고 뒹구는 곳이다. 선실로 들어가자마자 땀내며 발고랑내며 음식 내음 같은 시큼한 냄새가 훅 끼쳐온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저마다 보따리나 가방을 끼고 혹은 앉아 이야기 나누고 고스톱 치고 혹은 누워 잠 청하는 모습이 흡사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에 나오는 관부연락선 선실만 같다.

누가 나를 손짓하여 부르는데 보니 여객선 대합실에서부터 눈이 자주 마주친 얼굴 시커멓게 탄 남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인천과 텐진을 오가며 보따리 무역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와 그의 친구 둘은 왔다 갔다 배안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보따리를 나르고, 인천과 텐진 양쪽에 물건을 내려받고 올려주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그의 권유를 못 이겨 고스톱판에 앉았다 일어나니 기분이 씁쓰레했다. 무슨 사기도박단에 걸렸다 풀려난 기분이 반, 새로 자유를 얻은 기분이 반이었다. 갑판으로 나가니 웬 노인 하나가 다가와 담배를 청한다. 말투며 표정이며 행색을 보니 한국에 돈 벌러 왔다 뜻을 못 이루고 돌아가는 사람 같다. 담배를 빌려 태우던 그는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내게 말을 건넨다. 몇 가지 말이 기억에 남아 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연변에서 보았다는 탈북자의 모습이다.

북한 기관원들이 남자를 손을 묶고 코를 고삐처럼 꿰뚫어서 끌고 가는 걸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끌려가면 죽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게 정말이라고 자꾸만 되뇌이는 것이 그는 우리네가 사람 잘 안 믿음을 익히 알게 된 모양이었다. 나 역시 혹시 이 사람 무슨 기관원이나 아닐까 하여 괜시리 마음이 불안했는데……. 나중에 그런 일이 흔하다는 말을 텔레비전 같은 데서 들었다.

나는 남북한 정부가 대화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남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이 한반도의 한 모퉁이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같은 피를 나눈 북한 사람들의 처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남한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 왔다. 이제 나는 남한체제를 보던 그 마음으로 북한의 체제를 보고 북한 사람들의 삶을 걱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내일은 장담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한반도의 평화가 절실한 이 때, 그들을 함께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딜레마를, 나는 또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한단 말인가.

노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노인처럼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멀리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여 텐진으로 간다고 했다. 북방한계선을 피해 가야 하는 탓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스물 몇 시간이나 걸리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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