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도 유전?

등록 2002.01.30 08:22수정 2002.01.3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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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은 3개 동으로 되어 있다. 맨 뒷동인 가동 뒤편은 밭이고, 한 옆에는 작은 공터가 있다. 그 공터를 이용하여 뒷동의 한 집에서 개들을 기르고 있다. 네 마리까지 기른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두 마리가 사슬에 매여 있다.


그 집에서 개를 좋아해서 기르는 것은 아니다. 키워서 돈을 만들거나 복날의 몸보신을 위해 기르는 것일 뿐이다. 주택가 바로 옆에다 소규모이긴 하지만 개들을 기르는 것을 못마땅하게 보는 집들도 있다. 하지만 뒤에서 수군거릴 뿐 아무도 그것을 공론화시키지는 않는다.

동네 일에 많이 나서는 편인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공터를 이용하여 다만 얼마라도 돈을 만들려고 하는 일이니 시골 인심인 양 그냥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좋으리라는 생각이다. 노상 목이 매인 채로 사는 개들의 그 목줄이 혹여 끊어지기라도 해서 어떤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강아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목줄에 매여 살아야 하는 개들을 보노라면 불쌍한 생각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개 사육장의 작은 궤짝 같은 집에 갇혀서 겨우 운신만을 하며 사는 개들에 비한다면, 뒷동 공터의 그 개들은 가로 세로 뛰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사니 조금은 팔자가 좋은 편이다.

비록 타고난 운명이야 그렇다쳐도, 그 개들의 팔자가 좀더 좋은 것은 근처에 내 어머니가 사시는 까닭이다. 내 노모님은 그 개들에게 무척 신경을 쓰신다. 개들에게 줄 음식을 챙겨서 자주 걸음을 하신다. 개 주인보다 더 개들을 챙기는 본새다. 그 개들은 내 어머니가 눈에 비치기만 해도 가로 뛰고, 세로 뛰며 반가워 죽을 상이다.

개들의 밥그릇에 음식을 부어주고 따로 물도 떠다가 부어주고 하시는 어머니는 집에 와서 속이 상한 말씀도 종종 하신다.
"말 뭇허는 짐승을 그렇게 길러서는 안 되는디…."
개들이 배가 고파 환장할 지경이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경우를 또 접하신 까닭이다.


"이왕 짐승을 기르려면 정성 들여 길러야지….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그러는 수도 있겄지먼, 누구든지 짐승을 학대허는 것두 죄가 되는 겨."
정신없이 밥을 먹고, 한없이 물을 들이키는 개들의 불쌍한 꼴을 한두 번 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남의 개들에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어머니의 '동정심'을 확인하는 기분이다. 짐승에 대해서도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사시는 분이시니,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은 좀더 구체적이고 확연할 수밖에 없다.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지만,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가 올곧게 지녀오신 그 동정심은 필경 하느님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어머니의 그 동정심이 손자들에게로 전이되고 있는 듯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일요일 저녁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를 가장 귀중한 프로로 치고 꼭꼭 챙겨 보시는데, 아이들도 그 시청에 기꺼이 동참하곤 한다. 그 프로를 보면서 어머니는 "에그, 천오백만 원이 뭐여. 이천만 원 줄 것이지"라는 말씀도 곧잘 하신다. 그리고 손자 손녀에게 전화기의 단추를 누르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아이들은 즉각 행동을 하고…. 조손들 사이에서 아주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교감이 이루어지곤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전화기 단추 누르는 것에 대해서 슬며시 자제를 부탁하기도 했다.

"아빠가 가난한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단체에 후원회원으로 가입해서 고정적으로 내는 회비도 꽤 많아. 성당에 가서 내는 돈도 있고…. 그러니까 KBS의 '사랑의 리퀘스트'는 그냥 슬쩍 넘어가도 돼."

그러자 아들은 "그렇지만 그 후원회비들은 방송에 나오는 저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그런 아들은 지난 주일 저녁에도 누나와 할머니의 동의와 응원에 의해 전화기 별표 단추를 세 번이나 눌렀다. 방송을 보면서 누를 때는 접속이 잘 되지 않았다. "지금은 통화량이 많아 서비스를 제공해드릴 수가 없사오니 잠시 후에 다시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만 번번이 귀에 들릴 뿐이었다. 계속 접속이 되지 않아 짜증을 내는 아들에게 누나인 딸아이가 말했다.

"그건 그만큼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주려는 착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다는 얘기야. 얼마나 좋은 일이니."

누나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은 방송이 끝난 후에 다시 선행을 시도하기로 하고 일단 전화기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을 깜빡 잊고 방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웠던 녀석은 잠시 후에 "아참!"하면서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거실로 나갔다. 접속이 되어 전화기 별표 단추를 세 번 누르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녀석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3천원을 도왔다는 사실이 녀석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잠자리에 누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할머니의 동정심이 중학생인 딸과 초등학생인 아들의 가슴에도 잘 전이되고 있음을 느끼며 내 마음도 흐뭇하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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