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동심을 기리며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2.14 07:12수정 2002.02.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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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에 올린 '선친의 16주기를 맞으며'라는 글의 후속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들을 기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설 명절 끝이니, 조금은 어울리는 글일 듯싶습니다.

1986년 66세라는 아까운 연세로 타계하신 나의 선친 지동환(池東煥) 님께서 이 세상에 남겨놓으신 동화 작품은 모두 26편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선친께서 생전에 활자화된 당신의 작품들을 대하신 것은 충남 서산·태안의 동인지 <흙빛문학>과 사보(社報) <매일유업>에 발표한 다섯 편에 불과하답니다. 나머지 21편은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신 이후에 내가 찾아 정리해서 여러 지면에 발표를 했지요.


여러 해에 걸쳐 선친의 유고 작품들을 발표하는 동안 1993년에는 절반인 13편을 묶어 <도서출판 산하>에서 '산하어린이 54번'으로 '팥죽할머니와 늑대'를 펴내었지요. 이 동화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1991년 <민족문화작가회의>로부터 이오덕 선생의 발제로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을 위한 동화집과 소년소설집을 만들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나도 기꺼이 동참하여 동화 한 편을 보냈지요.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놀라운 각성을 하나 안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유고 동화 작품들이 다 활자화되지도 않았고 또 작품집을 만들지도 못한 상황에서 내 동화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었지요. 죄스러운 느낌에 당황하기도 하면서 나는 서둘러 내 작품을 회수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산하>출판사의 편집 책임자와 알게 되었고, 내 작품을 회수하려는 이유를 설명한 끝에 적극적으로 선친의 동화 작품들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활자화된 작품들을 모두 복사하여 출판사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산하>는 선뜻 출판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선친이 워낙 무명이셨던 데다가, 작품들도 대개가 '옛날'을 그린 것들이어서, 이래저래 성공을 자신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2년 동안 수없이 전화를 하며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인세'를 받지 않겠노라는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습니다.

"선친의 유고 동화집으로 돈을 벌 의사는 추호도 없습니다. 단지 그 동화집을 아버님 묘소 앞에 놓아드리고 절을 올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인세 걱정은 하지 말고 책이나 만들어주십시오."
이것이 내 간절한 소원이며 부탁이었지요.

이런 과정을 거쳐 어렵게 만들어진 '팥죽할머니와 늑대'는 그러나 출간 즉시 <어린이도서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독서 관련 단체들로부터 '권장도서' '추천도서'로 선정되면서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정확히 얼마나 팔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책은 몇 년 동안 <산하>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13편을 묶어 1998년 초에 <글벗사>에서 펴낸 '까마귀할머니와 파랑새'역시 나의 눈물겨운 노력과 애태움이 있었지요. 두 번째 책은 정식으로 인세 계약을 하고 책을 만들기로 했던 <산하>가 두 번째 책의 출판 의사를 번복하는 바람에 나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지요.

<청년사>가 조판 작업을 마친 상태에서 출판 보류를 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 우수한 동화들은 <산하>가 다 빼먹었다거나, '팥죽할머니와 늑대'처럼 저학년용으로 명확하게 대상을 집중시킬 수 있는 동화들이 아니라는 오해와 편견을 앞세워 출판을 거부한 출판사들도 있었고….


아무튼 나의 끈질긴 노력 끝에 1993년으로부터 4년이나 지나서야 다행스럽게도 <글벗사>와 인연이 맺어져서 마침내 나머지 13편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지게 되었지요.

선친께서는 임종하시기 하루 전 내 손을 잡으시고 당신의 가장 좋은 동화 몇 편을 남겨서 후일 내 자식들에게 보여 주라는 당부를 하셨지요. 그러나 나는 한 편의 작품도 소홀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을 순진 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셨고, 늘 어린이들을 사랑하면서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셨던 그분의 욕심 없고 가난했던 삶이 참으로 고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기에, 그분의 심성이 고스란히 담겨지고 표현된 동화 작품들을 모두 책으로 묶는 일은 내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정녕코 나는 '인세 수입'을 목적하고 선친의 유고 동화집 출판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아닙니다. 선친의 작품들을 한데 묶고자 하는 바람이었고, 아담한 책들을 아버님 묘소 앞에 놓아드리고 싶은 열망뿐이었습니다.

그 소망이 일단 모두 이루어진 셈이긴 합니다. 1994년 '충남도문예진흥기금'의 도움을 받아 펴낸 선친의 유고 시집'바람 뫼 뿐이어라'와 함께 2권의 유고 동화집을 선친의 묘소 앞에 놓아 드릴 수 있었으니 오래 무거웠던 짐을 이미 몇 년 전에 홀가분하게 벗은 셈이지요. 나는 어떤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함 쪽으로 지금도 내 마음을 잘 간종그리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평생 동안 순진 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셨고, 늘 어린이들을 사랑하면서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사셨던 나의 선친 지동환 님은 돌아가실 때도 꿈속에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하느님께로 간 분입니다.

간경화라는 병을 얻어 석달 동안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거나 가족들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하고 하느님께로 갈 수 있게 되기만을 소원하셨지요.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하루 전의 일입니다. 몸의 고통을 잊은 듯 한동안 고즈넉이 잠을 잔 선친께서 빙그레 웃으며 눈을 떴습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딸이 왜 그리 웃으시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선친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 명도 넘는 소년 소녀들이 꽃다발을 들고 와서, 나를 빙 둘러싸고 서로 자기 꽃을 받으라고 내미는 통에, 어떤 것부터 받아야 할지 곤란해서 웃은 거여."

그런 신비스러운 꿈을 꾸고 난 선친께서는 하루종일 무척 즐거운 기색이었습니다. 찾아오는 분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는 어머니에게 무슨 음식이 먹고 싶으니 어떠어떻게 만들어서 갖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반가운 나머지 얼른 일어나 방을 나가니, 선친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에그, 내가 그 음식을 어떻게 먹을 거라고 내 말을 곧이듣고 나가는 저 할망구, 순진맞기가 세계에서 일등이다."

그 말에 가족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말하자면 선친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내를 그렇게 놀려먹은 것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에도 그분이 그렇게 여유를 지닐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여유는 그분이 평생 동안 지니고 사신 동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비로운 꿈 역시 그분의 동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듯싶고….

그분이 세상에 남겨 놓으신 동화들과 시들을 읽어보면, 그리고 그분의 평생을 떠올려보면 그런 아름다운 꿈이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나의 선친 지동환 님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잠을 달게 자면서 최후로 꾼 꿈이 어린이들로부터 꽃다발을 받는 꿈이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 꿈속의 소년 소녀들은 하느님이 보낸 천사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린이의 모습으로 많이 나타난다는 천사들이 선친의 영혼을 영접하기 위해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진정으로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만,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셨던 선친은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에 드셨다고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선친 지동환 님이 세상을 뜨신 지도 벌써 16년이 되었습니다. 운명하시기 하루 전에 아들의 손을 잡고 당신의 동화들을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시던 선친의 음성이 지금도 내 귀에 새롭습니다. 선친의 그런 부탁과 아들된 도리에 의해서만 내가 선친의 책들을 만들었던 것은 아님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그분의 가난하고 정직했던 평생과 티없이 맑았던 동심이 너무도 고귀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므로, 그것은 내 인생의 명확한 등불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아버님으로부터 연유하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등불을 안고, 그 등불을 향해 오늘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덧없는 것임을, 그리하여 선하게 살아야 함을 다시금 체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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