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근근히 이어져 온 친일 잔재 청산 노력 | | | 문학적 성과가 아무리 높다한들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 | | | 이미 본문에서 살펴보았듯 광복 3년째 되던 1948년 9월, 국회를 중심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를 구성함으로써 친일 역사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당시 반민족 행위자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던 권력층에 의해 흐지부지되고, 이내 반민특위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이후 다가끼 마사오(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연이어 들어섬에 따라 역사 청산 작업은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으나, 문민정부와 김대중 정부 들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나 다시금 친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특히 근래에는 정부나 국회 등이 아닌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고 있는 양상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반민족행위자 및 그의 후손들이 이미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정부나 국회가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대정신은 아직 살아있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역사 청산을 위한 연구 작업이 활발한데, 먼저 지난 해 2월 28일, 3?1절을 맞아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완용과 고영희, 서정주,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등 '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자' 692명의 명단과 함께 구체적 친일 행적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그동안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광복회(회장 윤경빈)'와 함께 진행해온 사업의 결과물로, 광복회가 밝히기를 꺼린 16명에 대해서도 자체 조사 후 친일파로 규정, 그 명단과 내용을 함께 공개했다. 당시 '광복회'가 공개를 꺼렸던 16명에는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 우리나라 최초 여성박사 김활란과 시인 모윤숙, 작곡가 홍난파와 현제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실천문학>이 광복절을 맞아 '친일 문학작품 명단'을 발표했다. '민족문화작가회의' 및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작성한 이 명단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된 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명단에는 모두 42개의 이름이 올랐는데, 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곽종원, 김동인, 김동환, 김기진, 김문집, 김상용,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박영호, 박영희, 박태원, 백철, 서정주,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이찬, 이헌구, 임학수,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홍효민. (ㄱㄴㄷ순)
특히 이광수가 103편으로 최고 영예에 올랐고, 43편의 주요한과 26편의 최재서, 25편의 김용제, 23편의 김동환, 22편의 김종한, 14편의 노천명과 백철, 13편의 채만식, 11편의 서정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한편 최남선 옛집 철거 사건과 나날이 성장해 가는 시민 의식을 밑천으로, 일제 시대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져갈 것으로 보인다. 아예 반민특위가 세워질 당시 확실히 짚고 넘어갔더라면 이러한 역사적 수고를 덜었을 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있어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한 만큼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평가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