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기념관? '친일문학관'이 우선

[문화유산답사 - 53] 헐려버린 '최남선 옛집', 그 세 번째 이야기

등록 2003.02.02 19:35수정 2003.02.0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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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최남선은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의 지원을 얻어 잡지 <동명>을 만들고 친일적인 내용을 골자로 글을 쓰며 청년들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부추겼고, 이후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간다.

최남선은 1922년 조선총독 사이토의 지원을 얻어 잡지 <동명>을 만들고 친일적인 내용을 골자로 글을 쓰며 청년들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부추겼고, 이후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며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간다. ⓒ 권기봉

"제군! 대동아의 성전은… 세계 역사의 개조이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진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1943년 11월 2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가라! 청년 학도여>라는 최남선의 글에서)

지난 [문화유산답사 - 51]과 [문화유산답사 - 52]에서 살펴보았듯 이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옛집 '소원(素園)'은 지난 25일(토) 우리들 시야에서 영영 사라져갔다. 부끄러운 친일 역사를 증언해주던 현장 하나가 더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과연 '소원의 주인공' 최남선은 어떤 사람일까?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주로 문학적인 업적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그의 친일(親日) 경력에 대해서는 그저 간단하게 한번 훑고 지나가는 식이다.

심지어는 근대시(近代詩)를 선보이는 등 문학사적 업적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독립운동을 했다고까지 기술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카뮈의 말대로 역사적 죄과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 따르지 않으면 결국 미래에 올 범죄에 대한 면죄부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지난 답사기에서는 바람에 휘날려 사라져가는 최남선 관련 자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정작 '최남선은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소홀히 다루고 말았다. 몇몇 독자들로부터 이에 대한 지적을 받고 과연 최남선은 어떤 인물이며, 당시 그와 같은 반민족 행위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고, 이번 철거 논란을 통해 제기되는 문제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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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2월 현재 최남선 옛집은 폐허일 뿐이다.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 이제는 70평형대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인근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최남선 옛 집터는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아파트 뒤편에 있는데, 지금은 건설사에 의해 최남선 옛집이 철거된 후 장막이 둘러쳐져 일반인은 출입하기 힘들다.

2003년 2월 현재 최남선 옛집은 폐허일 뿐이다.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5-1번지. 이제는 70평형대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고 인근 주민들은 전하고 있다. 최남선 옛 집터는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아파트 뒤편에 있는데, 지금은 건설사에 의해 최남선 옛집이 철거된 후 장막이 둘러쳐져 일반인은 출입하기 힘들다. ⓒ 권기봉

물론 최남선이 민족 문화 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않았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남선은 잡지 《소년》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新體詩)인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등 한국 근대 문학을 이끌어온 사람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애족적 행동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바로 '짧았던 애국(愛國)'을 끝내고 바야흐로 '기나긴 매국(賣國)'을 시작할 즈음이다.

'반항을 위한 불평불만'이 사라진 최남선


3.1운동으로 투옥됐다가 1921년 10월 가석방된 후 두 달이 지난 1921년 12월 25일, 드디어 최남선은 '말(馬)을 갈아탔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즉 일본 도쿄의 아베(阿部充家)라는 자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는 경성일보(京城日報) 사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해군 대장 출신으로 당시 조선총독으로 있던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조언자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최남선이 그에게 편지를 한 이유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쓴다. "선생께서 주신 책을 읽고 시대의 추세를 거의 파악하게 되었다"고. 장문의 편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져 "금후(今後)에도 선생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 "《동명(東明)》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고 싶다"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1922년 창간된 22면의 타블로이드판 《동명》은 예상하다시피 친일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던 주간지로, 조선 총독 사이토와의 연줄을 배경으로 독립 의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하게 된다. 아베를 연결고리로 하는 사이토 총독과 최남선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 관계를 이루고 있던 것으로, 놀랍지만 1920년대 초반의 최남선은 1919년 3월의 그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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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은 하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 30대 초반부터 보이기 시작한 최남선의 친일 성향은 1928년에 이르러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조선총독부 소속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이 기관은 '조선과 일본이 결국은 같은 뿌리에서 왔다'는 이른바 '일조동근론(日朝同根論)' 등을 주장하며 조선과 동아시아 역사를 왜곡하던 단체로, 식민 사관을 개발하는 데 앞장선 단체로 알려져 있다.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으로 일하면서 민중의 독립 의지를 꺾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변절자'라는 애칭아닌 애칭을 달고 살아가게 된다.

이후 그는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만주의 어용(御用) 신문이라 할 수 있는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을 거쳐, 이듬해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만주에 설립한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쉽게 말해 부귀와 영화가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청년들아, 대동아 성전에 참가하라!"

더군다나 최남선은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조선 청년들을 향해 학도병에 자원입대하라며 참전을 독려하기도 한다. 그가 참전을 독려했던 대상은,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도병 자원을 권고하러 현해탄을 건넌 예에서도 알 수 있듯 국내와 일본을 넘나들고 있다.

실제로 1943년 11월 14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도쿄의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학도 궐기 대강연회에 참가, 열변을 토한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每日新報>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a 1943년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출정하는 학도병과 그를 환송하는 어머니. 최남선은 조선은 물론 일본까지 가서 조선 청년들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부추긴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출정하는 학도병과 그를 환송하는 어머니. 최남선은 조선은 물론 일본까지 가서 조선 청년들의 태평양전쟁 참전을 부추긴다. ⓒ 민족문제연구소

"우리 일행은 동경을 중심으로 맹활동을 하였다.… 우리는 지난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학도 궐기 대강연회를 열었는데 그 때의 성황과 학도들의 열의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학도들은 황국을 위하여, 대동아건설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불타는 결의로 충만한 우렁찬 모습들이었다.… 나는 원컨대 입영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건전한 신체와 열렬한 순국의 결의로 매진하여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주기 바라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7일에도 <매일신보>에 쓴 '전력증강 총후 수호의 진로'라는 논설을 통해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전쟁이 이기리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것은 일본 국민의 영혼의 힘이 세계에 절대하기 때문이다. 미.영의 물량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한도가 있다. 그러나 영혼의 힘에는 한계가 없다. 만일 이 전쟁에 우리들의 운명이 참패를 당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류의 영원한 비극이요, 벗어날 수 없는 암흑의 운명을 뜻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겨야 한다."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던데?"

그러나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고착화되어 가던 당시에도 민족혼은 완전히 말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남선이 아무리 끝없는 영욕을 위해 달려가도 이에 대해 일갈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있었으니, 먼저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 그는 한 동이의 술을 최남선의 집 대문에 뿌리고 "육당은 죽었다"며 통곡하고, 길에서 최남선이 인사하자 "최남선은 이미 죽었다던데"하고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버렸다 한다.

한용운(韓龍雲) 선생도 최남선이 1928년 조선사편수위원이 되자 생초상(生初喪)을 치러준 바 있고, 역시 길에서 만난 최남선이 인사를 하자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故人)이오"라고 일갈한다.

여기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역시 빠지지 않는다. 당시 대구 감옥 수감 생활이 14년째로 접어들 무렵, 김창숙 선생은 일본인 간수가 읽어보라며 최남선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건네주자 "이런 흉서(凶書)가 있는가"며 책을 마루에 내던지고 "기미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 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라며 울분을 토했다고 전해진다. 최남선의 변절은 결국 위당과 만해, 심산으로 하여금 슬픔을 유발했고, 한반도 역사의 부끄러운 한 페이지로 남게 된 것이다.

a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가 전남 광주에 설치한 투서함에 중절모를 쓴 두 사내가 투서하고 있다. 국회는 1948년 9월 7일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특위를 구성, 1949년 1월 8일 박흥식 체포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간다.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전라남도 조사부가 전남 광주에 설치한 투서함에 중절모를 쓴 두 사내가 투서하고 있다. 국회는 1948년 9월 7일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반민특위를 구성, 1949년 1월 8일 박흥식 체포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간다. ⓒ 역사학연구소

그러나 이런 변절에 대한 최남선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마포형무소에 반민족행위로 수감 중이던 1949년 2월 일종의 자백이라 할 수 있는 '자열서(自列書)'를 통해 그것은 단순히 '돈을 위한 방향전환'에 지나지 않았다면서, "나는 의사(義士)가 되기보다 학자(學者)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학자보다 의사가 되라는 일반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나는 분명히 한평생 한 일을 한마음으로 매진하였다고 자신한다"면서 "조선사편수위원이나 중추원 참의,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었으나 나는 언제나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역사의 건설, 그것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다"며 자신의 행위를 옹호했다.

역사 청산의 호기를 놓쳐버린 '오! 필승 코리아'

그러나 '역사'라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광복 후 1948년 9월 대한민국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를 구성한다. 드디어 광복 3년만에 친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모두 22조로 구성된 당시 반민법은 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의 범주를 다소 협소하게 규정함으로써 수십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친일파 중 그 정도가 심한 7천 명 정도를 처벌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서 업무를 시작, 사흘만인 8일 화신백화점(지금의 지하철 1호선 종각역 밖 '밀레니엄 타워' 자리에 있었음) 사장이었던 박흥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가 일제(日帝) 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고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 총 682명을 조사하고 221명을 기소했으나,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조사원들을 체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반민특위 활동은 흐지부지되고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a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 처벌법, 이른바 반민법의 발효로 반민족 행위자들은 법정으로 끌려갔다. 특히 사진은 1949년 2월의 풍경으로, 앞에서 세 번째 사람은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이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 처벌법, 이른바 반민법의 발효로 반민족 행위자들은 법정으로 끌려갔다. 특히 사진은 1949년 2월의 풍경으로, 앞에서 세 번째 사람은 3․1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33인의 한 사람인 최린이다. ⓒ 역사학연구소

결과적으로 1950년 봄까지 반민법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은 자들은 곧바로 풀려났고, 사형집행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일제 치하 반 세기동안 뒤틀려버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 역사의 엄연한 후퇴다.

그 결과 부당한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독점한 반민족 행위자 및 그 재산을 상속한 후손들은 지금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떵떵거리며 살아가고 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전락해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연명해 가고 있는 것이 2003년 2월 삭풍이 부는 '오! 필승 코리아'의 풍경이다.

반민특위가 이처럼 허무하게 해체된 데에는 주지하다시피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미군정(美軍政)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즉 취약한 정치 기반을 메우고자 친일 경찰과 군, 친일 자본가를 필요로 했기에 그에게 있어 반민특위란 그저 눈엣가시에 지나지 않았고, 반공(反共)을 기치로 삼아야 했던 미군정으로서는 친일 경력을 가진 이들이 입맛에 맞았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나 김약수 당시 국회부의장 등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정치인들 상당수가 1949년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됨으로써 당시 역사 청산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이들에 대한 기억은 시나브로 사라져갔다.

특히 친일 행각을 일삼았던 일부 경찰간부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에게 테러를 가하려는 모의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청 수사과장 최란수와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전 수사과장 노덕술 등이 그들로, 수사과장실에 모여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로 하여금 대법원장 김병로와 특별검사부장(검찰총장) 권승렬, 국회의장 신익희 등 반민특위 위원 중 비교적 강경파에 속했던 15명에 대해 테러를 가하라고 사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백민태가 자수해 일당이 구속되기는 했으나, 반민족 행위자들이 반민특위 위원들에 대한 직접 테러를 기도했다는 점은 실로 후안무치(厚顔無恥)가 아닐 수 없다.

a 1959년 05월 29일 안중근 의사의 동상에 헌화하고 있는 이승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이화장(梨花莊)에 남아 있다. 이승만은 담화 등을 발표하며 줄곧 반민특위의 행동을 억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9년 05월 29일 안중근 의사의 동상에 헌화하고 있는 이승만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이화장(梨花莊)에 남아 있다. 이승만은 담화 등을 발표하며 줄곧 반민특위의 행동을 억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권기봉

결국 이때 기회를 놓쳐버린 '일제 역사 청산 작업'은 이승만 대통령 이후 만주군 장교 다가끼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이 연이어 집권함으로써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최남선 옛집' 철거가 아니라, 친일을 대하는 태도가 더 안타까운 것은 아닐까?

다시 최남선. 그가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친일 행위가 극에 달할 즈음 살던 서울 강북구 우이동 5-1번지 '소원(素園)'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미 지난 [문화유산답사 51]과 [문화유산답사 52]에서 말했듯 이제 최남선 옛집을 보기 위해서는 철지난 자료를 뒤적이거나 지난 기사에 함께 올라와 있는 사진을 보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라크와 북핵(北核)을 향하고 있을 때 최남선 옛집은 조선총독부 청사처럼 영영 사라져버렸고, 철거 직전까지도 관련 유품들은 완전 무시되다가 철거를 며칠 앞두고 겨우 살아남는 정도였다.

그러나 어찌 보면 변절의 장소였던 최남선 옛집이 사라지는 것 자체 혹은 철거 직전까지도 바람에 나부끼는 최남선 관련 편지와 서류들이 안타까운 것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다. 즉 더 안타깝고 무서운 것은 최남선 옛집과 그가 남긴 자료들을 대하는 태도가, 친일 문인 나아가 친일 전반에 대한 현대 한국인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친일 경력을 지닌 신문들이 나서서 '민족지'라며 선전하는 통에 국민들의 판단력이 잠시나마 흐려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친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2003년 2월 현재 거의 무시해도 될 만한 수준이다.

'다가끼 마사오 기념관'보다 '친일문학관'이 먼저다

최남선 옛집이 사라진 지금, 차제에 '친일 문학관' 등의 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 박정희의 기념관, 그것도 박정희 향수에 젖은 일부 단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혈세를 직접 투입해 건설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그와 같은 건립 결정이 박정희의 경제 업적을 높이 사는 동시에 현실 정치적인 이유에서 나왔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없는바 아니다. 그러나 그릇된 역사를 청산한다는 것이 단순히 정치인의 인기 제고를 위해 결정될 사안은 아니며, 그래서는 결코 안 될 일이라는 것쯤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a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특위 조사원들을 체포함으로써 활동을 방해한다. 사진은 이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로, 한국전쟁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이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 특위 조사원들을 체포함으로써 활동을 방해한다. 사진은 이 사건에 깊숙이 간여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로, 한국전쟁 당시 노덕술이 헌병사령부에 근무하던 모습이다. ⓒ 역사학연구소

반민족 행위, 특히 친일문인들에 대한 사료들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념관이 우리나라엔 아직 없다. 최남선 옛집 철거 논란을 계기로 문인의 역사적 변절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활성화되고, 차제에 친일 문학관을 세워 연구와 교육을 동시에 아우르는 종합적인 역사 교육의 장(場)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제 '순수문학'에서 나아가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아세아의 해방>을 목적으로 <일장기의 물결>을 일으켜 <총동원의 태세>로 <가라! 청년 학도여!>라고 외치며 <성전찬가>를 부른 이들을, 국민들이 알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과연 '최남선 옛집'은 돈 때문에 팔린 걸까?
'땅 부자'와 그의 자녀들이 느꼈어야 했을 비운

지난 1월 19일 최남선이 살던 최남선 옛집을 방문하면서 '왜 이 집이 헐리게 되었을까?'하고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후손들의 사정이 변변치 않아 돈이 필요해 팔기로 한 것은 아닐까”하는 결론을 나름대로 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최남선 옛집 앞에 높이 서있는 성원아파트 터는 원래 최남선의 소유였다고 한다.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성원아파트 터는 2900여 평 규모로, 땅이 팔릴 당시 140억 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았을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최남선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일부 토지를 빼앗길 만큼 '땅 부자'였는데 서울 우이동과 상계동, 수유리 일대에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를 두고 '최남선이 부자였지 그 자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부모가 부자라고 해서 꼭 자녀들까지 부자란 법은 없을 뿐더러, 부의 대물림이 아닌 정당한 노력을 통해 후손들이 부를 축적했을 수도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전제를 하고서도 그것이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는 경우도 있는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땅 부자' 최남선은 자녀들에게도 고급 교육을 시키며 의대 등에 진학시켰다. 최남선의 아들은 국립대 소아과 교수로서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및 소아과학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으며, 최남선의 손자들은 현재 서울 강남에서 피부과 의사나 대학 교수 등을 하고 있고, 손자사위들 역시 기업체 대표 등을 지내는 등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 같은 사실은 '최남선의 후손들도 굳이 '소원'을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내용을 요지로 하는 진정서를 서울시에 냈다는 사실과 함께, '소원'이 건설사에 매각된 이유를 간접적으로나마 설명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반민족 행위자의 자녀로 태어나 평생토록 느껴야 했을 비운(悲運)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지난 1983년 '육당 시조문학상'을 만드는 등의 일들이 더 이상 벌어져서는 안된다. 또한 참회록(懺悔錄)을 쓴 윤동주나 아버지 김동환을 대신해 사과했던 그의 아들 김영식씨와 같은 경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권기봉 기자

근근히 이어져 온 친일 잔재 청산 노력
문학적 성과가 아무리 높다한들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미 본문에서 살펴보았듯 광복 3년째 되던 1948년 9월, 국회를 중심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이른바 반민특위를 구성함으로써 친일 역사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당시 반민족 행위자들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던 권력층에 의해 흐지부지되고, 이내 반민특위는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이후 다가끼 마사오(박정희)와 전두환, 노태우 등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이 연이어 들어섬에 따라 역사 청산 작업은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없었으나, 문민정부와 김대중 정부 들어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나 다시금 친일 문제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시작되었다. 특히 근래에는 정부나 국회 등이 아닌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진척되고 있는 양상인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반민족행위자 및 그의 후손들이 이미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정부나 국회가 공식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시대정신은 아직 살아있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역사 청산을 위한 연구 작업이 활발한데, 먼저 지난 해 2월 28일, 3?1절을 맞아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김희선)'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완용과 고영희, 서정주,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등 '일제하 친일 반민족 행위자' 692명의 명단과 함께 구체적 친일 행적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그동안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광복회(회장 윤경빈)'와 함께 진행해온 사업의 결과물로, 광복회가 밝히기를 꺼린 16명에 대해서도 자체 조사 후 친일파로 규정, 그 명단과 내용을 함께 공개했다. 당시 '광복회'가 공개를 꺼렸던 16명에는 <조선일보> 방응모와 <동아일보> 김성수, 우리나라 최초 여성박사 김활란과 시인 모윤숙, 작곡가 홍난파와 현제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실천문학>이 광복절을 맞아 '친일 문학작품 명단'을 발표했다. '민족문화작가회의' 및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작성한 이 명단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된 글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명단에는 모두 42개의 이름이 올랐는데, 그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곽종원, 김동인, 김동환, 김기진, 김문집, 김상용, 김소운, 김안서, 김용제, 김종한, 김해강, 노천명, 모윤숙, 박영호, 박영희, 박태원, 백철, 서정주, 송영, 유진오, 유치진, 이광수, 이무영, 이서구, 이석훈, 이찬, 이헌구, 임학수,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최재서, 최정희, 함대훈, 함세덕, 홍효민. (ㄱㄴㄷ순)

특히 이광수가 103편으로 최고 영예에 올랐고, 43편의 주요한과 26편의 최재서, 25편의 김용제, 23편의 김동환, 22편의 김종한, 14편의 노천명과 백철, 13편의 채만식, 11편의 서정주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한편 최남선 옛집 철거 사건과 나날이 성장해 가는 시민 의식을 밑천으로, 일제 시대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커져갈 것으로 보인다. 아예 반민특위가 세워질 당시 확실히 짚고 넘어갔더라면 이러한 역사적 수고를 덜었을 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있어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한 만큼 지금이라도 이에 대한 평가 작업이 계속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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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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