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바로 진짜 '산사 찾아가는 길'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25)-금정산 원효암

등록 2003.11.07 09:06수정 2003.11.0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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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금정산 제일봉인 고당봉도 가을 옷을 입었다.

금정산 제일봉인 고당봉도 가을 옷을 입었다. ⓒ 임윤수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에게 "<오마이뉴스>를 아느냐?"고 물으면 백 중 백이 다 안다고 말 할테니 '<오마이뉴스>는 인터넷 종합 일간지로…' 어쩌구저쩌구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막상 누군가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 "그게 뭔데요?"라는 반문을 듣게 되면 조금 난감해진다.

솔직히 "그 유명한 <오마이뉴스>를 모른단 말이야?"하는 반감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알고 있는 사람에겐 유력한 인터넷 종합 일간지지만 모르는 사람에겐 생소한 것이 당연하다.


오늘날의 <오마이뉴스>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 생각된다. 어찌 보면 시대적 흐름을 잘 타 봇물 터지듯 그렇게 유력 언론 매체로 부상된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더구나 인터넷이라고 하는 온라인에서 운영되니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영 어색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싶다.

산사를 찾아 사진을 찍으려면 스님들의 허락을 얻어내는 게 제일 첫 번째 관문이다. 국보급 보물과 역사적 유물의 보고라 할 수 있는 많은 절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

a 금정산정 돌벽과 나란한 억새가 가을 길을 걸어보라고 유혹하는 듯 하다.

금정산정 돌벽과 나란한 억새가 가을 길을 걸어보라고 유혹하는 듯 하다. ⓒ 임윤수

절을 찾게되면 제일 먼저 법당에 들러 참배하고 종무소엘 들러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린다. 어떤 때는 일반인인 사무장을 통하여 용건을 말하기도 하지만 스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님께 합장으로 인사드리고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려면 땀부터 난다. '이 스님은 <오마이뉴스>를 알고 계실까?' '모르고 계시면 어떻게 설명을 하지?' 등 이런저런 궁상이 그렇게 만든다.

다행히 스님께서 <오마이뉴스>를 알고 계시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로 사진 촬영을 허락받고 좋은 말씀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나름대로 모범 답안이라 생각되는 설명으로 <오마이뉴스>를 소개하고 왜 사진을 찍으려 하는지 이해를 구해야 한다.


좀 뭐한 얘기로 절이 많이 알려지길 원하는 스님들은 내심 반기는 면도 없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스님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간처럼 조용한 수행 생활과 선에 비중을 두시는 스님을 만나게 되면 영 이야기가 어려워진다.

a 머릿속으로 그리던 산사 찾아가는 길은 원효암 가는 길에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산사 찾아가는 길은 원효암 가는 길에 있었다. ⓒ 임윤수

찾아다니는 산사에서 만나 뵈었던 많은 스님들은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셨다. 스님들이 무관심하거나 외면해서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환경이 모를 수밖에 없음을 알기에 더 이상 당황스럽지는 않다.


자가 발전으로 겨우 전기를 해결하고 있는 심산유곡 산사에 인터넷망이 연결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러다 보니 인터넷에서만 운영되고 있는 이런저런 사이트 중 하나인 <오마이뉴스>를 모르고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나이 드신 스님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컴퓨터 숲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에 살면서도 50대 중반을 넘긴 많은 사람들은 아직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거나 생소해 하고 거리감 있어 하는 게 현실이다.

일상이 온라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터넷과 밀접한 생활권에 살면서도 나이 드신 어른들에겐 어색한 것이 컴퓨터며 인터넷인데, 접속은 물론 구경조차 여의치 않은 산사에서 생활하시는 나이 지긋한 스님들이 인터넷을 이해 못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런 스님들께 허락을 받아내야 하니 송구스럽게도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나름대로 유력 언론 매체라고 자부하는 <오마이뉴스>를 시큰둥하게 받아들일 때는 약이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사진이 필요하고 설명이 필요한 것을.

a 산등성이엘 올라서니 원효암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산등성이엘 올라서니 원효암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 임윤수

절에서 사진 촬영을 금하는 데는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관습적으로 사진 촬영을 금하는 곳도 없지는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젊은 스님이 사진 찍는 것을 제재하는가 하면 노스님이 쾌히 승낙해 주실 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큰 규모의 절에 법력 높은 큰스님이 기거하고 계실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개 큰스님들은 암자 규모의 풍광 좋은 절에 기거하고 계시는 경우가 많으니 암자를 찾다 보면 뜻밖에 고명한 스님들이 계신 곳을 찾아 좋은 말씀을 듣는 기쁨을 얻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찾은 부산 금정산 원효암이 그런 곳 중의 한 곳인 듯하다.

원효암(元曉庵)은 범어사에서 30분 정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는 곳으로 범어사 산내 암자 중 제일 꼭대기에 있다.

통일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범어사를 창건한 해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미륵과 함께 세운 것으로 알려진 원효암을 찾아가는 길은, '아! 이 길이 바로 산사 찾아가는 길이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a 울창한 나무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부도가 따사롭게 가슴에 와 닿는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비추는 햇살에 부도가 따사롭게 가슴에 와 닿는다. ⓒ 임윤수

구도(求道)의 길에서 만난 선후배이자 친구 사이였던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는 불교계에 독특한 철학을 구축한 지도자이자 국가와 민중의 등대였다. 구도의 동반자였던 두 스님의 관계는 '의상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고, 원효가 있는 곳에 의상이 있다'는 말로 모든 것이 함축된다.

이 두 분 스님이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에도 함께 하신 흔적을 남겨 놓았으니 범어사와 원효암 그리고 스님들의 좌선 장소였던 의상대와 그 위쪽 200m 지점에 있는 원효석대가 그것이다.

범어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금정산을 오르다 왼쪽으로 들어서면 원효암엘 갈 수 있다. 예전에야 어쨌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잘 살피지 않으면 입구를 그냥 지나칠 만큼 특별한 표식조차 없이 조용한 수행처로 있길 원하는 곳이다.

웬만한 암자 같으면 눈에 띄는 안내 표지 하나쯤은 있으련만 원효암엔 그것조차 없었다. 범어사엘 들러 산내 제일 꼭대기에 있는 암자를 찾으니 원효암을 소개해 준다. 등산로를 따라 30분쯤 올라가면 된다고 쉽게 설명해 준다.

어린 아이 엉덩이처럼 동글동글한 바윗길인 금정산 오르는 길은 모진 마음조차 부드럽게 해 줄 듯하다. 따뜻한 곳이라곤 하지만 가는 세월 어쩔 수 없는지 금정산도 울긋불긋 단풍에 젖어있다.

a 휙 굽어진 길을 올라 원효암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이 문을 들어서게 된다.

휙 굽어진 길을 올라 원효암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이 문을 들어서게 된다. ⓒ 임윤수

이미 잎새 떨군 수종이 있는가 하면 아직 푸르름을 그대로 간직한 수종도 있다. 30분은 족히 걸었으련만 아직 어떤 표식도 보이질 않는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오르다 보니 눈앞에 성곽이 나타나니 원효암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쳐 금정산성 북문에 도착한 것이다.

복잡한 도심지에서만 길을 헤매는 게 아니고 한적한 산에서도 알려 준 길조차 못 찾는 길맹인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측은한 생각까지 든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가 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원효암 가는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해 꼭대기까지 올랐으니 덕분에 금정산성엘 들리게 되었고 구구절절한 전설이 흐르는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도 오르게 되었다.

금빛 물고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논다는 금샘(金井)이 있는 금정산 최고봉인 고당봉에는 평생을 불심으로 살다 죽어간 한 화주 보살에 얽힌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범어사는 빈번하게 화재로 전소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으니 그 첫 번째가 임진왜란 당시 모든 건축물들이 잿더미로 변한 일이라 한다.

동래성을 함락한 왜놈들은 울산 지방에 상륙한 왜군들과 합류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며 주변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범어사를 알게 된다. 침략군 왜군들이 화엄 10대 사찰로 불교계의 명맥을 계승하는 범어사의 웅장한 기운을 그대로 둘 리 만무했다.

a 원효암은 마치 한옥의 여염집 같다.

원효암은 마치 한옥의 여염집 같다. ⓒ 임윤수

더구나 범어사는 지정학적으로 대마도를 향해 자리하고 있으며 왜군들의 침략을 기선 제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고 하였으니 왜군들의 작심한 방화로 완전 전소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 때 밀양에 살던 화주 보살은 범어사가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숨에 달려와 절을 잃고 망연자실한 스님들을 위로하고 중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바랑 하나 걸머메고 천리길 마다 않고 탁발로 시주를 받은 할머니는 스님들이 연명할 끼니를 만들고 주변을 정리하며 불가에 심신을 맡기게 되었다.

죽기 전에 예전의 범어사 모습을 되찾는 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서원이자 기도였다. 할머니는 범어사 중건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마다 않고 하였으며 능력 모든 것을 기꺼이 헌신하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탁발로 시주를 해 오며 절 살림도 도맡아 꾸려 가던 할머니는 당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알고 어느날 주지 스님께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봉우리 아래에 고모선신(姑母善神)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姑母祭)를 지내 주면 넋이라도 금정산의 수호신이 되어 범어사 재건에 헌신하겠습니다"하고 조용한 유언을 남긴다.

a 색 바랜 고색의 단청에서 원효암의 유구함이 느껴진다. 전각 가운데 '원효암'이란 편액이 붙어있고 우측에 추사 김정희선생님의 친필인 '無量壽閣' 편액이 붙어 있다. 언뜻 '天量壽閣'이라 읽을 수 있겠다.

색 바랜 고색의 단청에서 원효암의 유구함이 느껴진다. 전각 가운데 '원효암'이란 편액이 붙어있고 우측에 추사 김정희선생님의 친필인 '無量壽閣' 편액이 붙어 있다. 언뜻 '天量壽閣'이라 읽을 수 있겠다. ⓒ 임윤수

살아생전 전소된 범어사 중건을 위해 미력을 다하던 할머니는 사후에라도 금정산에 머물며 범어사 재건을 소원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은 할머니의 고귀한 뜻을 살려 그의 유언에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짓고 1년에 두 번씩 (음력 1월 15일, 5월 5일) 고당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의 유언처럼 범어사는 다시 중건하게 되었고 화엄의 대표적 사찰로 자리잡게된다. 이 때부터 별다른 이름이 없었던 금정산 제일봉은 할머니의 깊은 불심을 기리기 위해 할미 고(姑)에 집 당(堂) 자를 써 고당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예기치 않게 금정산 제일봉인 고당봉까지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산장에서 다시 길을 물어 원효암을 찾았다. 반들반들 길이 난 하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철조망이 굽어지는 지점에서 커다란 흔적 없이 샛길처럼 생겨난 오른쪽 길로 접어드니 철조망을 따라 걷게 된다.

혼잡할 만큼 많은 등산객들 무리에서 뚝 떨어지게 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발걸음조차 한결 가벼워진다.

한참을 그렇게 걷다 보니 철조망이 조금 열려 있고 '원효암'이란 글씨가 새겨진 손바닥 크기의 안내판 조각이 보인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서 산길을 따르니 지금껏 마음속으로 그리던 산사 찾아가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a 원효암에서 화려한 장엄물은 보이지 않는다. 무량수각이란 쓰여진 편액 아래쪽에 놓여진 소종이 보일 뿐이다.

원효암에서 화려한 장엄물은 보이지 않는다. 무량수각이란 쓰여진 편액 아래쪽에 놓여진 소종이 보일 뿐이다. ⓒ 임윤수

생소하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런 친근감 있는 길이 정말 고즈넉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길이라곤 하지만 여느 길처럼 반듯하지도 매끄럽지 않았지만 눈길 주고 발길 줌에 너무 편안한 그런 길이다.

휘어지고 굽어지는 길을 따라 등성일 넘으니 저만치 산 아래로 동네가 보이고 길 옆으로 절에서 가꿈직한 채마전이 보인다. 채마전 오른쪽 울창한 나무숲에 3기의 부도가 보이니 원효암이 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부도전에서 조금 더 들어가니 휙 굽은 길 안쪽에 오래된 느낌 물씬한 출입문이 보인다. 총총걸음으로 원효암이란 편액을 달고 있는 출입문의 보이지 않는 문턱을 넘으니 한가롭기만 한 원효암이 거기에 있다.

오랜 세월에 산뜻함을 잃은 색 바랜 단청이 남아 있는 야트막한 기와집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절집에서 보아 왔던 화려함은 없고 수수한 여염집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정면에 보이는, '元曉庵'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전각으로 들어가 참배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처사(남자 신도)에게 용건을 이야기하니 스님을 불러 주신다. 젊은 스님은 큰스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며 큰스님이 계신 곳을 다녀와 사진 촬영을 허락해 주셨다.

그때서야 원효암에 범어사 조실 지유(知有) 스님이 주석하여 계심을 알았다. 조실 스님이란 부처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좌표이자 스승의 상징이 되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범어사와 여기에 소속된 크고 작은 수많은 말사의 많은 스님들에게 스승이며 정신적 지주가 되는 가장 큰스님이 원효암에 주석해 계신 것이다.

a 솟을대문처럼 생긴 이 문을 나서게 되면 원효암을 다시 나서게 된다.

솟을대문처럼 생긴 이 문을 나서게 되면 원효암을 다시 나서게 된다. ⓒ 임윤수

절이라고 해야 별다른 장엄물이 없다. 그냥 산속에 있는 조용한 기도처 같은 분위기다. 굳이 장엄물을 들라고 하면 마루에 올려진 소종이 있을 뿐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전각 오른쪽에 큼지막하게 '天量壽閣'라 써진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량수각'이란 말이 생소하고, 한문을 잘 모르기에 스님께 여쭈니 '천량수각'이 아니고 '無量壽閣'이라 써진 것이며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친필이라고 알려주신다.

과거불인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전각을 극락전이나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하니 이곳 원효암에선 아미타 부처님을 모셔 놓고 '무량수각'이라 표현을 하였나 보다 하였더니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은 관세음보살님이라 한다.

글씨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추사 선생님의 친필을 조용한 산사에서 대하니 또 다른 감흥이 인다. 원효암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선방은 아니었지만 선방에 버금가는 수행 공간인 듯하다.

스님은 원효암이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반가와 하지 않는 듯하였다. 불자들이야 언제고 찾아와 기도하고 불공을 드려도 좋지만 자칫 등산객들이 들렸다 지나가는 유희의 장소로 알려질까 염려하시는 듯하다.

조용한 산사! 마음으로 그리던 수수한 절집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원효암은 정말 절집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만 찾았으면 좋겠다. 아주 겸손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산사 찾는 길을 걷고 싶고 그런 경험을 꿈꾸는 사람들이 찾는 금정산의 산사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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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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