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색 황홀함 속에 걸음을 쉬고

[천진난만하게JH, 산티아고 가는 길 25] 레온에서

등록 2007.12.20 18:44수정 2007.12.2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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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플라자 마요르 아침풍경 스페인 레온에서

플라자 마요르 아침풍경 스페인 레온에서 ⓒ JH


2007년 7월 12일 목요일, 날씨 맑고 구름, 순례 20일째.
레온에서, 0 km.


지난 밤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고요한 아침, 갑자기 순례자 숙소의 괴로운 코골이 소리마저 그리워진다. 우선 대성당에 가 보기로 했다. 내부로 들어서니 위압감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어두운 실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해 들어오는 오색 빛에 황홀해졌다. 목을 길게 빼고 벽면을 쳐다보다 고개가 아플 정도였다.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만 있어도 좋을 것 같다.


긴 시간 기도를 하고 또 멍하게 있다가 성당 성물점에 갔다. 검은색 플라스틱 책받침(?) 같은 재질에 스테인드글라스 한 면이 곱게 인쇄된 기념품을 하나 사 왔다. 한국에 돌아와 명동성당에 갔을 때 무심코 쳐다본 벽면에 곱게 자리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며, 내가 왜 그렇게도 레온의 그것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성스러움이었다.

숙소의 개장시간에 맞춰 짐을 풀고 밀린 빨래며 샤워를 했다. 하나 둘 도착하는 순례자들 가운데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괜히 마음이 편해진다. 이틀을 걷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에 없던 피로감을 느꼈다. 푹신한 시트에 기대 달려온 100km가 지금까지 걸었던 300여km보다 더 혹독한 것처럼 느껴졌다.

a 레온 대성당에서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

레온 대성당에서 오색의 스테인드글라스 ⓒ JH


정오쯤 대충 일이 마무리되어 시에스타 전에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고는 가방 속에 밀어 넣었다. 오늘은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자. 분주한 대로를 따라 사람들의 인파에 휩쓸리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처음 들어가 본 스페인 서점에서 순례의 또 다른 길 '카미노 델 노르테(Camino del Norte)'에 대한 책을 볼 수 있었다. 해안을 따라 걷는 순례라…, 욕심이 났다.

그리고 도시의 또 다른 성당을 찾아가 보고, 동네 재래시장에서 처음으로 본 포도와 검은색 복숭아를 샀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눈은 적당한 식당을 찾기 시작했다. 골목골목을 샅샅이 휘젓다 노천에 나와 있는 식탁에 깔린 자주색 테이블보가 마음에 들어 무작정 자리를 잡고 앉았다. 푸실리 파스타에 양념통닭 냄새가 나는 닭과 감자요리, 그리고 앞으로 나의 단골 디저트가 된 '아로즈 콘 레체(Arroz con Leche, 달콤한 크림에 밥을 넣고 시나몬가루를 뿌린 것)'을 양껏 먹었다. 이 한 상이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옆 테이블에 신문을 펼치고 앉은 식당 주인 같은 남자가 큰 소리로 웃다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도 하며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그 주변을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식당의 일손들이 바지런히 오고간다.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을 마주치면 난처해질 것 같아 곧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제는 펜션을 찾는데 30여분을 소비하고 오늘은 점심을 먹을 식당을 찾는데 꽤 오랜 시간 발품을 판다. 하나의 숙소, 하나의 식당이 전부인 마을에서는 그저 감사히 받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데. 과연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찾는' 일에 온 힘을 쏟다 진이 빠지는 일을 나는 하고 있는 걸까? 사실은 매양 같은 건데, 괜히 '더', '더'를 찾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게 삶일까?

오늘의 유일한 한 끼는 공들여 찾은 성과가 과해, 주는 대로 열심히 받아먹은 덕에 과식하고 말았다. 쪼로로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모로 눕힌 채 꼼짝없이 있었다. 마치 보아 뱀이 코끼리를 통째 삼키고 소화시키기 위해 꼼짝하지 않는 것처럼.


a 레온 대성당 전면 화려한 장미창과 외관

레온 대성당 전면 화려한 장미창과 외관 ⓒ JH


시에스타에서 느지막히 깨어 가장 먼저 간 곳은 전화방이었다. 오래간만에 한국에 전화를 한다. 집과 가게는 통화중, 핸드폰도 불통이다. 곧 깊은 숨을 토해낸 후 한국으로 달음질치려는 마음을 힘겹게 붙들었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관광객이 넘실대는 거리를 배회하다 숙소로 돌아왔다. 널어놓은 빨래를 걷는데 익숙한 노란 폴로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피터였다! 얼마만의 만남인지, 부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어떻게 지냈냐며 안부를 주고받았다.

"함께 걸었던 줄리아나 기억해요? 당신이랑 걷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만났는지 궁금해서요."
"응. 다시 만나 며칠간 같이 걸었지. 지금은 헤어졌어. 나도 궁금한 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숙소 담벼락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당신의 이야기가 내 순례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었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그저 이야기를 전했을 뿐 길 위에서 느끼는 것들은 모두 네 것이라며 내일부터 열심히 걷자고 힘을 주는 아저씨가 참 반가웠다.

a 레온 대성당에서 박물관 가는 통로

레온 대성당에서 박물관 가는 통로 ⓒ JH


빨래를 품에 안고 숙소로 들어서려는데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의 젊은 여성은 언뜻 보기에도 아시아 계였다. 옷가지를 개어 가방을 대충 정리한 후 다시 마당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왔는데, 어디서 오셨나요?"
"네. 일본에서 왔어요."


우에무라 미도리씨는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1년 간의 스페인 생활을 마무리하는 대장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길이었다. 주변 친구들의 권유로 마음을 정하고 '발렌시아(Valencia)'에서 이곳까지 장장 10시간 넘게 걸려 방금 도착했다고 한다. 그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그동안 많이 쉬어 내일은 30km 정도를 걸으려 한다고 말했다.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Órbigo)'를 목적지로 정하고 내일 아침 함께 걷기로 했다.

우여곡절 가운데에서도 산티아고는 하루하루 가까워진다. 처음 생장피드포르에 닿았던 때가 떠오른다. '할 수나 있는 일일까?' 그 후로 20일, 지금 나는 첫 날로부터 464km를 지나왔고, 앞으로 산티아고까지는 300km가 남았다. 아주 가끔 더는 못하겠다는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다. 그만큼 가끔 매운 음식이 그리워지고, 조금 더 많은 시간 가족들을 생각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좋기만 하고 즐거운, 길 위에서의 또 하루가 저문다.
#산티아고가는길 #스페인 #성지순례 #도보여행 #카미노데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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