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내학살 위령제가 열리던 날

유가족, 시민단체 등 250여명 참여

등록 2000.07.09 09:17수정 2000.07.0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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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 50 주년을 맞는 2000년 7월 8일.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직 마음속에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채 회한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 기나긴 세월을 돌아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멀리 제주에서, 부산에서, 여수에서, 그리고 대전 근교에서. 50년 전 그날, 그곳. 학살은 끝이 났지만 50년 전 학살은 유족의 한 맺힌 오열 속에 다시금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는 유족들의 오열로 시작됐다. 지난 해 12월 재미 학자 이도형 박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당시 학살현장 사진을 접한 유족들은 그 처참한 광경에 차마 발걸음조차 떼지 못하고 50년 간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아이고… 어쩔 거나"
"아이고, 아이고… 요렇게 죽여놓고"
"아이고, 아이고… 확인 사살하네, 확인 사살해"
"아이고, 아이고… 이게 웬말이냐"

결혼 10개월 째 부군인 강한기씨(당시 23살)를 잃은 00씨(72)는 50년만에 처음 와본 학살현장에서 당시 현장 사진을 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렇게 처참하게 남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시 6살, 3살에 불과 했던 여해영(남 56 청주), 여정렬(여 53 대전)씨 남매는 얼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산내로 달려왔다. 지난 50년 간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감나무로 신을 만들어 묘를 쓰고 제사를 지내왔다는 그들은 "당시 대전형무소의 아버님 명단이라도 봤으면 좋겠다"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제서야 열린 공간 속에서 위령제를 지냅니다."

11시 민족예술단 우금치의 살풀이 공연으로 시작된 위령제는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김제선 사무처장의 사회로 약 두 시간 여에 걸쳐 진행됐다. 애국지사 숭모회 이규희씨의 산내학살 진상조사 활동 보고에 이은, 내빈들의 추모사, 헌화 분향, 희생자에 대한 추모시가 낭독되는 동안 이를 바라보는 유족들의 마음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아버지를 잃은 송영길씨는 "담담합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봉분이라도 만들어 제라도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라며 심정은 이해하지만 아직도 나서지 못하고 있는 유족들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마을 주민 10여명이 집단 희생을 당한 성보경씨는 미처 참석하지 못한 마을 유족들을 대신해 공동 위패라도 모셔야 겠다며, 마을 희생자의 이름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대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신석봉씨의 진혼굿이 이어지자 유족들은 희생자의 넋을 조금이라도 더 달래기 위해 자리를 뜰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인들에게 술잔 한잔 올리는 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만큼 흐르는 눈물과 한 맺힌 가슴을 쓸어내리며, 골령골 구천에서 떠도는 원혼들이 이제 편히 잠들게 하고픈 소망은 간절하기만 했다.


대전교도소 산내학살 대전유족회장을 맏고 있는 정준섭씨는 "누구에게 얘기도 못하고 50년 세월을 보냈습니다. 앞으로 유골수습과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민족화합과 통일의 길로 접근하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는 입장을 밝혔다.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반 백년을 살아온 이들.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갈등과 반목의 현장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이들이지만 이제 그들이 바라는 것은 역사의 현장에 모든 것을 묻고 화해와 상생을 통해 민족이 하나되는 길이었다.

50년만에 치뤄지는 위령제는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위령제의 시작을 알렸던 민족예술단 우금치가 상여소리 시연을 통해 50년동안 골령골을 헤메던 희생자의 원혼을 마지막으로 위로하고 있었다.

"외로운 넋이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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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충남 민언련 매체감시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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