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어"

한 양심수 어머니의 쓸쓸한 '추석맞이'

등록 2002.09.19 11:02수정 2002.09.2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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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며칠 앞두고 명절 준비에 다들 여념이 없을 때, 한평수(66, 대전 중구 유천동)씨는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어" 민혁당사건으로 수감중인 임태열씨의 어머니 한평수(66)씨
"명절이 없었으면 좋겠어" 민혁당사건으로 수감중인 임태열씨의 어머니 한평수(66)씨정세연
99년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작년 3월,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중인 임태열(37)씨의 어머니 한평수씨를 만난 건 18일 오후. 마침 '이적단체 가입'으로 7년형을 받고 수감되었다가 4년만인 지난달 16일 출소한 장민철(47)씨와 함께 계셨다.

"우리 아들은 조금이라도 허튼 짓 안 해. 고집이 세서 그렇지. 저 생각하는 거 있으면 꼭 해야하니. 언젠가는 우리 큰아들이 그러더라구. 태열이 저렇게 된 거 어머니가 시키지 않았냐고. 항상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고 하지 않았냐고. 그래서 태열이가 정직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 그런 거라고."

어려서부터 착하고 똘똘해 온갖 귀여움을 받았던 작은 아들이 좋은 시절에 펴 보지도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만 한 어머니. 갖은 고생하며 아들을 키웠어도 잘 키웠다고 주위의 부러움을 많이 샀다며 잠깐 웃음을 보이신다.

"저들 잘 사는 거 보려고 그랬지. 내가 호강하려는 게 아닌데. 나야 살아도 얼마나 살겠어. 내가 제일 억울해…내가 제일 억울해."

매주 목요일 서울 탑골공원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 집회에 다니시는 어머니는 9월 들어 그마저도 못가봤다며 안타까워하셨다.

"며느리, 손녀랑 목요집회에 다녔지. 언젠가는 태열이 편지를 누가 읽어주는데 그걸 들으면서 아빠 사진을 들고 있던 손녀딸 지원이가 얼마나 서럽게 흐느끼는지. 다들 울었지. 아빠를 무척 좋아하고 잘 따르는데 그 어린 게 다 알아듣는가벼"하며 눈물을 훔치신다.

어머니는 요새 신앙으로 살아가신다고. 십자가 아래 작은 아들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어머니는 요새 신앙으로 살아가신다고. 십자가 아래 작은 아들의 사진들이 걸려있다.정세연
작은아들 태열씨가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 재학중이던 당시(91년) 아들이 '서울대 민족해방활동가 조직' 사건으로 수배중이라는 소리를 듣고 어머니는 당장 학교로 달려갔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우리 태열이가 뭘 잘못했다고. 학교에도 자주 갔어. 우리 아들 소식 들으려면 학교로, 집회장소로 달려갔지. 누가 '태열이형 어디에서 봤어요'하면 그래도 어딘가에 살아있기는 하구나 안도하며 돌아왔지. 학교를 걸어 내려오면서 얼마나 통곡했는지..."

다시금 목이 메어오신다. 96년 6월, 작은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서울 한 예식장에서 직계가족들만 모여 조용히 올린 결혼식이었다.


"우리 태열이가 결혼하면 큰 집 사서 형하고 어머니하고 다같이 산다고 했었는데. 이제 그러지도 못해"라며 안타까워하신다.

작은며느리는 6살난 손녀와 경기도 성남에서 생활하고 있고, 큰아들은 대전에 있지만 사정상 왕래가 잦지 않다며 명절 때도 생일에도 언제나 혼자 있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그간의 외로움과 고통이 묻어난다.

"큰 거 바라지도 않어. 가끔씩 일 있을 때 다녀가고 그러기만 해도 바랄 게 없지. 이제는 그것도 힘들 것 같아. 다 포기했지 뭐. 우리 태열이 나오는 거 보고 산으로 들어갈 생각도 해. 전에도 한 번 산 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지. 태열이 결혼하고 얼마 안돼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어. 버려진 노인들을 모시는 거였는데 좀더 있다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한 달에 두 번씩 면회를 가시는 어머니는 추석 면회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오늘 아들에게서 오지 말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신다.

지난달 출소한 장민철(47)씨는 임태열씨와 같은 교도소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장씨와 아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지난달 출소한 장민철(47)씨는 임태열씨와 같은 교도소에서 생활했다. 어머니는 장씨와 아들 이야기에 여념이 없으셨다.정세연
"이제 자주 가지 말아야겠어. 한 번씩 갔다가 돌아올 때면 뒤돌아 다시 가고 싶고 심난하고 그렇지.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우리 아들도 똑같을 것 같아."

내년 9월 출소를 앞두고 있는 아들이 좀 더 일찍 나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굽힐 수 없는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듯했다.

"운동 그만하고 후원이나 하며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 잘못 되지나 않았으면 좋겠어"

아들이 출소하는 모습만 봐도 여한이 없다는 어머니. 지난 10년의 고통,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어머니는 신앙으로 살아가신다고.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은 아들과 함께 성당에 나가는 것이다.

벌써부터 명절맞이에 들뜬 보통 사람들과 달리 어머니는 가끔씩 찾아와 주는 사람 하나하나 모두 가족같고 반갑다. "이런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어"하며 손을 꼭 잡아주시는 어머니에게 어서 빨리 따뜻한 추석이 찾아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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