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1.21 14:08수정 2002.01.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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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나 연시에 새해 달력을 걸 때 아내가 매번 하는 일이 있지요. 지난 해의 달력을 1월부터 차례로 넘기면서 새 달력장의 중요한 날들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고 간단한 사항들을 적는 일이지요.


'중요한 날'들이란 우리 부부가 잊지 않고 기념을 하거나 어떤 형태로든 잘 챙겨야 할 날들을 이르는 것인데, 범위가 비교적 넓고 또 세밀한 편이기 때문에 그만큼 달력장들에 그것들을 일일이 기재하는 일도 간단하고 수월한 일이 아니지요.

방과 거실과 화장실 등의, 적어도 세 개의 달력에는 확실한 표시를 해 놓고 수시로 달력을 보고 살면서도 종종 그 중요한 날을 깜빡 잊는 수도 있으니, 그것에서도 산다는 일이 참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끼곤 한답니다.

지난해 11월, 가운데 제수씨의 생일을 깜빡 잊고 넘어갔지 뭡니까. 이틀 전까지도 달력의 표시를 보면서 "모레 아침에 축하 전화를 해줘야지"하고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당일에는 까맣게 잊었던 거지요. 어머니도, 아내도, 아이들도…. 아무도 왜 하루종일 달력도 보지 않고 살았는지…. 저녁 때가 다 돼서야 제수씨 생일인 것을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가족 외식 행사를 가졌는데, 제수씨가 무척 고마워하면서도 이런 말을 하더군요.

"남편이야 원래부터 그런 일에는 무신경한 사람이니까 아예 기대하지도 않지만, 해마다 남편 대신 제 생일까지 챙겨주시던 아주버님이 올해는 하루종일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이상하게 섭섭하더라구요. 정말 섭섭했어요."

나는 제수씨에게 미안하면서도, 다 저녁 때서라도 그 날이 제수씨의 생일인 것을 알게 된 것이 다시금 천만 다행으로 느껴지더군요. 생각하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달력장의 표시들을 보면 1월에도 중요한 날들이 많습니다. 지난 4일은 큰 처제의 생일이었고, 10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고, 11일은 누님의 57회 생신일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21일은 가운데 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이고, 오는 28일은 가운데 동생네 외동딸의 다섯 살 되는 생일이고….

오늘이 바로 가운데 동생 부부의 결혼 12주년 기념일이어서, 우리 가족은 어제 저녁에 또 한 번 회식을 했습니다. 원래는 오늘 저녁에 가족 회식을 하기로 작정을 했었는데, 경기도 평택의 일터 숙소에서 기거하며 작업을 하고 있는 동생이 월요일에는 작업 후에 태안까지 오기가 힘들다고 일요일 저녁을 희망해서 하루 전 날인 어제 저녁에 가족 회식을 한 거지요.


음식은 특히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아구탕을 선택했지요. 1인분에 1만 원인 아구탕 전골 6인분을 3인분씩 냄비 두 개로 나누어서 여덟 명 가족이 먹었는데 부족하지가 않았습니다. 세 아이가 밥 대신 칡냉면을 먹었어도 비용은 정확히 8만 원. 10만 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나는 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 축하 가족회식 행사를 기분 좋게 잘 치른 거지요.

두 형제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결혼기념일을 맞은 동생 부부에게 박수를 쳐주고, 함께 맛있게 저녁을 먹는 그런 소박한 정경을 특히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조촐한 가족 행사가 어머니께는 그대로 구체적인 효도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절로 듭니다.

내가 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까지 챙겨주는 것에는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형제의 우애하는 모습이야말로 노모를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효도이리라는 생각에서이지요.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에는 맏이 되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이고….

동생이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가 형만큼 다정다감하지를 못해서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챙기는 것에는 너무 무관심하고 그 무관심을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 형편이니 나라도 동생 대신 세심성을 발휘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야 제수씨도 조금이라도 사는 재미가 나고, 조카들도 어린 시절의 즐거운 일들이 머리에 많이 남을 테고….

어제 저녁에 적이 즐거운 기분이었던 동생은 오늘 아침 다섯 시쯤에 경기도 평택의 일터로 출근을 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좋지 않아서 되돌아왔답니다. 용접 기술자로 일용직인 동생은 일기 불순으로 일손을 놓게 되면 마음이 편치 않은 기색을 보이곤 합니다. IMF 전에는 일당을 15만 원까지 받았고, 지금은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12만 원 정도 받는 모양인데, 퇴직금이 적립되지 않는 일용직인 것을 내 아내가 더욱 안쓰럽게 여깁니다. 아내가 자주 집에서 회식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실은 시동생을 위로하기 위해서이고….

어제 저녁에 내가 동생 부부의 결혼기념일 축하 가족회식 자리를 마련했지만, 오늘이 진짜 기념일이고, 동생이 평택의 일터에서 일찍 돌아오기도 했으니 이따 저녁때쯤 막걸리 한 병 사들고 뒷동의 동생집에 가볼 생각입니다. 형과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보면 겨울의 불순한 날씨에 일터에서 쫓겨 온 동생의 우중충한 마음도 다시금 훈훈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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