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1.23 14:54수정 2002.01.2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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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오늘 서울엘 갔다. 중·고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오전 11시 모임이라면서 아침 식사 후 설거지까지 해 놓고 9시쯤에 버스를 탔다. 예전에는 거의 5백 리 길이었는데, 느긋이 2시간 전에 출발해도 괜찮을 만큼 길이 짧아진 것은 순전히 서해안고속도로 덕분이다.


보름 가까이 연수를 갔다 온 후 며칠 안 되어 또 출타를 하는 것이 어머니께는 죄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동창 모임에 빠질까도 생각했으나, 총무를 맡아 수많은 동창들에게 모임을 알린 처지이고 보니 그건 너무 무책임한 일이었다. 결국 아내는 어머니로부터 허락을 받고 서울까지 동창 모임에 참석하려고 간 것이다.

나는 아내를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주면서 조크를 했다.
"당신, 팔자 좋은 줄 알어."
그러자 아내가 대꾸하는 말, "당신이 몰라서 그래요. 동창 모임에 가면 진짜로 팔자 좋은 친구들은 거기 다 있다구요."

아내는 충남에서는 가장 알아주는 명문 중·고교 출신이다. 우리 고장에 고등학교가 생기지 않았으면 아예 고교 졸업장도 없을 뻔했던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의 모교를 좀 우습게 안다. 아내의 동창들 이른바 명문고 출신 중산층 여인네들의 사고방식을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

근거가 있는 일이다. 이미 몇 년 전에 그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7년에도 아내는 동창 모임에 참석하러 서울엘 갔었다. 동창들 대부분이 서울 강남에서 살더라고 했다. 강남 중산층의 품위 같은 것이 잘 발휘되고 있는 모양새들이었다고 했다.

때가 때인지라 자연스럽게 병역 의무를 비킨 이회창 씨의 두 아들에 대한 얘기가 화제로 올랐단다. 그런데 동창들의 절대 다수가 국민들의 지지를 크게 잃고 있는 이회창 씨의 처지를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니냐", "나도 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더란다.


아내는 당혹하면서 아득한 이질감과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동창들이 병역 의무를 비킨 이회창 씨의 아들들에 대해서 분노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둔을 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는 그 분별 없고 천박한 사고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노라고 했다.

집에 와서 내게 그 얘기를 들려주면서 아내는 연방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기만 한 동창들의 태도가 무섭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아들을 두고 있는 같은 처지로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없고, 훗날 아들을 반드시 군대에 보낼 생각만 해 온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 더욱 슬펐노라고 했다.


그때 내가 아내에게 했던 말을 상기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당신 동창들이 한결같이 복터진 팔자들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 명문고를 나오고 대학을 나오고 이른바 중산층에 진입해서 풍족하게 살다보니 어떤 자신감 때문에 그런 말까지 하게 되는 것 아닐까? '나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는 말속에는, 이미 최소한의 현실적인 조건을 갖추어 놓았다, 그 조건을 활용해 보고 싶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을 거야. 그런 상황이라면 최소한의 양심이나 도덕에 대한 신념 따위도 거추장스러워지기가 십상이지. 배부른 돼지보다 고민하는 소크라테스가 한없이 미련해 보이고…."

그 뒤로 나는 아내가 일년에 한두 번씩 동창회 모임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오래도록 총무직책을 벗지 못하고 있는 아내는 올해도 서울행을 했다(아내의 그런 노력에는 <태안문학> 후원회원을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하는, 즉 남편을 돕고자 하는 의지도 작용하고 있다).

나는 아침에 아내를 배웅하며 또 이런 말을 했다.
"올해도 국민의 병역 문제에 관한 얘기가 화제로 오르기 쉽겠어. 유승준이라는 가수 아이가 병역 의무를 비키기 위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완전히 미국인이 되기로 했다니까…. 당신이 한번 그 문제를 화제로 올려봐. 당신 친구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나 알아볼 겸…. '나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는 생각을 실천한 사람도 있나 좀 알아보구."

아내는 시큰둥한 기색이었다.
"이미 아들을 군에 보낸 친구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쉽게 변할 리 있겠어요?"
"왜?"
"더구나 이회창 씨가 대통령 될 판인데…."
"의미 심장한 말이군."
나는 다시 한번 의미 심장하고도 심란한 상황을 체감하며 음울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태안에서 먼길을 올라간 아내도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 모처에서 지금 한창 아내의 모교 동창회 모임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자리에 어떤 화제들이 오를까. 또 한번 국민의 병역 의무에 관한 문제가 화제로 오른다면, 오늘은 어떤 이야기들이 오갈까? 또다시 "나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보내지 않겠다"는 말이 대세를 이룰까?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마침내 다시 바보 꼴이 되는 것 아닐까? 오늘 아침에도 초등학생 아들에게 군대 얘기를 들려주면서 "네가 커서도 병역 의무가 유지된다면, 네가 당당하게 군대를 가야 너도, 아빠도, 엄마도 다 떳떳해진단다"라고 말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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