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관련한 단상

<박상준의 소설 읽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등록 2002.09.08 10:55수정 2002.09.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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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과 관련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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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에 따라 말해 보자면, 실상은 제3의 항목에 대한 욕망이 독서 과정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전설적인 기사 아마디스에 대한 동키호테의 욕망이 그의 기행을 가능케 하듯이, 이러한 경우, 특정한 작품을 대하는 독자가 둘의 관계 밖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내장한 채 그리고 그에 휘둘린 상태에서 독서 과정에 뛰어듦으로써 온전한 독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된다.


작품의 전언, 작품이 발하는 효과를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감상 태도 곧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 보는 태도라 할 수 있는 키취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경우의 한 가지 양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담론 또는 작품을 하나의 화두로 하는 작품 바깥의 어떤 관계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까지를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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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서른 일곱 해를 넘겨 산 지금에 와서이다.

차분히 말을 할 필요가 있겠다. 먼저, 다들 짐작했겠지만, 이 글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작품론은 아님을 밝혀 두자. 이 글의 흐름이 작품의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은 까닭이며, 무엇보다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작품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내 독서 경험을 찬찬히 풀어 볼 필요가 있겠다.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책의 서지를 보면 초판 1쇄의 발행 연도가 1989년으로 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 번역 출간된 적이 없다면 내가 이 작품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초판 발행 이후일 것이다. <상실의 시대>를 앞에 두고서도 <노르웨이의 숲>이라 계속 말하는 것은, 내게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한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명으로 소개했기 때문이고, 그런 말을 들은 것이 빨라도 1989년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말을 해 준 사람이 일본어로 이 작품을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까닭이다.

이제는 솔직히 말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 절의 앞에서 나는 <노르웨이의 숲>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이 그러했는데, 내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그 타인과의 이런저런 관계가 모두 끝나 버리고도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바로 작년 늦여름이나 가을 무렵, 그리고 요즈음이다.


작년 늦여름이나 가을 무렵에서까지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살스러워서였다고 할 수 있다.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이 작품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기에, 그럼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망증을 우려하는 나이에 이러한 곡예는 무척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어서,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이번 학기 강의 항목 중에 이 작품을 넣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혹은, <노르웨이의 숲>과 관련된 이런저런 껄끄러운 감정을 이번 기회에 털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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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작품을 읽어 보라고 한 사람은 누구였던가. 내가 와타나베 같은 유형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녀 역시 나오코 같은 인물형이 아니었음은 분명하지만, 와타나베가 나오코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녀에게로 향하는 내 심정을 어쩔 수 없었던 바로 그런 상대였다, 내게 <노르웨이의 숲>을 권한 사람은.

옛날의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이 소설을 권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이것을 권했을 때의 그녀는 지금의 그녀가 아니니 그녀 역시 알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우리는 그때, 지금보다 10년은 더 젊었고, 그때보다 다시 10년쯤 전에 시작된 묘한 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으리라고 짐작이 될 뿐이다.

묘한 관계라고 했지만, 실상 지금에 와서 보면 묘하다 할 것도 없다. 열아홉 스물의 나이에, 추상인 만큼 강렬했지만 추상인 까닭에 정체는 모호한 감정의 여울 속에 함께 있었던 것뿐이다. 한껏 다가가기 위해 동시에 서로를 쳐다볼 때도 있었지만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대부분은 한쪽만이 상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의 주체와 대상의 역할을 어쩌다 바꿔 보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공통의 배를 만들어 타고 여울을 넘게 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알게 된 지 20년 가까이 각자 따로 살아오면서, 상대편의 행복을 축하해 주기보다는 불행을 위로해 주는 데 더 익숙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가슴 아픈 일이다. 대학 시절의 처음 다섯 학기를 빼면, 우리는 아주 가끔씩 만났고, 몇해 동안 전혀 소식도 모르고 지낸 적도 있었다. 반면, 그녀의 애인과 함께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있고, 내 아내와 함께 만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우리 집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사정을 잘 아는 친구들은 우리를 특별한 관계로 기억해 주기도 하였으나, 서로에게 있어 우리는 친구 그 이상일 수 없었음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렇게 독서 기록을 남기기까지 하게 된 마당에서 예전에 있었을 뭔가 다른 의미를 추론해 보는 것은 어찌 보면 꼭 필요한 일인 듯하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노르웨이의 숲>을 권하던 그녀의 심중에 어떤 생각이 있었을까 하는 무의식상의 궁금증이,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떤 의미의 끈을 새롭게 다져보고자 했을 내 자신 속의 욕망의 요동이, 그러한 지향이, 이제는 덧없는 것으로 아니 추억으로 변해버렸음을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변화의 증거는 다름 아니라, 끝내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을 다 읽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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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은 매우 특이한 소설이다. 무엇보다도 한국 근현대소설사의 흐름에 비춰볼 때 그러하다. 내가 읽고 겪어 본 소설들 일반이나 내가 배우고 공부한 소설론, 문예학 이론들에 비춰서도 그러하다.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도록 스스로는 자기의 색채를 갖고 있지 않은 작품이다.

비유를 걷고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그러하기 때문에 이 점은 힘껏 강조할 만하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어디에 있으며 그의 나이는 몇이나 되었는가. 수업 관계로 받아본 학생들의 독서감상문들은, 함부르크 공항의 보잉 747기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를 서술자라고들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라는 첫 문장이 그걸 알려 준다. 서술자가 와타나베인 것은 맞지만 그의 서술 시점은 서른 일곱 이후이다. 서술 시점의 그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서술 시점의 그의 의식 수준이나 태도, 인생관 등도 짐작할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 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이중의 회상 구조가 드러나는 1장에서의 상념을 빼면, 기즈키의 죽음을 뒤로 하고 고향을 떠나고자 하던 자신의 심정을 정리하는 부분(71쪽)과 하쓰미의 죽음에 대한 다소 모호한 의미 부여(351쪽) 정도 외에는, 서술자에 의한 논평이나 의미 부여의 구절을 찾기 어렵다.

1990년대 한국 소설의 특징 중 하나로 지적되는 '소설의 영화화'의 원류가 하루키이리라는 짐작이 들만큼, 그의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도 미도리도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가사와와 함께 어울려 다니는 와타나베뿐만이 아니라, 미도리 앞에서 짐짓 의젓한 체도 하는 와타나베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오코에게 함께 살 계획을 전하는 와타나베 역시 레이코 여사와 관계를 맺는 와타나베처럼 어떤 의미에서도 자성적(自省的)이지 않다. 와타나베 자신이 희미하고 불투명한 까닭에, 그가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나는 앞에서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색채를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열려 있다고도 했다. 이 작품이 열려 있다는 것은, 다소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닫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닫혀 있는 작품이란, 대개의 소설들이 그러한데, 하나의 자족적인 체계처럼 기능하는 작품을 말한다. 작품의 의미 효과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작품 속에 있는 이런저런 요소들이 모두 협력하는 작품, 책의 앞뒤를 왔다갔다해 보면 각처의 개개 요소들이 왜 거기 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가 확인되는 작품들이 닫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좀더 일반적인 표현을 쓰자면, 하나의 잘 빚어진 항아리처럼 완결된 작품이 그것이다. 이광수의 소설처럼 시도 때도 없이 서술자가 개입하여 시시콜콜히 설명을 함으로써 의미의 완결을 강조한다거나, 베토벤의 교향곡처럼 아주 작은 선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끌어모아 총주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용해시키지는 않는다 해도, 대부분의 예술 작품들은 완결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은 닫혀 있지 않다. 틈이 없게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앞서 조금 언급했듯이, 서술 상황 자체가 열려 있다. 이중의 회상 구조에서 최후의 회상 주체인 서술자가 투명할 뿐 아니라, 서른일곱 살의 와타나베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며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젊은날의 와타나베로 작품이 종결됨으로써 서술 시점의 두 와나타베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주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다소 지엽적이겠지만 인물 구성상에서 볼 때, 돌격대가 맥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든지, 똑같은 정도로 맥없이 하쓰미가 존재하는 것이라든지 등도 작품의 의미 구조를 열어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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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의 소설적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어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어른이 되어서 멕시코도 가고 함부르크도 가는 와타나베가, 점차 스러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록하듯이, 나도 내 기억을 더듬어 본 것뿐이다. 와타나베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나오코의 부탁을 실행해 준 것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내게 권한 사람, 그녀와의 기억을 되살려 본 것인가. 이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애초부터, 내게 한 여자가 있었는지, 그녀에게 내가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대상이 <노르웨이의 숲>인지 <상실의 시대>인지가 불분명해진 것도 이런 사정 탓이 아닐까 싶다.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문학사상사, 2000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민음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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