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꿩고기

<행복을 퍼내는 마중물 동화>

등록 2002.12.31 04:49수정 2002.12.3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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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는 심한 폐병을 앓았다. 쌀이 귀하고 고구마가 한 끼를 대신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뭍에 나가려면 뱃길로 서너 시간을 가야만 했던지라 병원은커녕 변변한 약조차 쓸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날로 초췌해져가는 할아버지 때문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며칠 전 어느 날이었다. 밥알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 분이 갑자기 꿩고기가 드시고 싶다고 하였다. 할머니와 식구들은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때는 꿩을 잡을 수 있는 총포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단지, 극약을 주입한 노란 콩을 길목에 놓아두고 꿩이 그 콩을 주워 먹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꿩을 잡으려면 며칠이 걸릴지, 아니면 내내 못 잡을 수도 있었다.

도회지처럼 사냥꾼이 있었다면 수소문해서 꿩고기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저 한숨만 쉬어야 했다. 극약이 주입된 콩을 숲 속 길목에 놓아두었지만 며칠 동안 허탕만 쳤다. 그러던 중 할머니께서는 식구들을 조용히 불러 모아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 시절 폐병에는 쥐고기가 좋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절대 쥐고기만은 먹지 못한다고 해서 그 요법만은 쓰지 못했다. 할머니의 제안은 이참에 쥐고기를 꿩고기라고 속여서 할아버지가 드시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쥐고기의 맛이 단백하기에 눈치 채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쥐고기를 꿩고기라 생각하며 맛나게 드셨다. 곁에서 지켜보던 할머니는 몰래몰래 눈물을 훔치셨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원하던 마지막 음식일 수도 있겠다는 안타까움과, 그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 서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며칠 뒤 할아버지께서는 새벽녘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세상을 뜨셨다. 할머니의 짐작처럼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드신 음식이 쥐고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일로 인해서 가슴 속에 깊은 못 같은 한을 박고 사셨다.

내가 열 살 무렵부터 할머니는 막걸리와 담배를 배우셨다. 어쩌면 눈물뿐인 허전한 가슴을 술과 담배로 채우고 싶었을 것이다. 장가를 들어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식들도 그 자리를 메워주지 못했다. 별난 억척 때문에 조금씩 늘어나는 논밭도 그 서늘한 가슴을 데워주지는 못했다.

그리움 끝에 마시는 막걸리와 빈 가슴을 쓸어주는 담배만이 할머니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 오는 눈물의 촉매역할을 하는 것도 막걸리와 담배였다. 그래서인지 밭일 하다가 컬컬한 막걸리 한 잔 들이키는 할머니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한다. 고된 일 뒤에 휴식처럼 담배 한 대 피우시던 할머니의 쓸쓸한 모습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막걸리와 담배의 양이 조금씩 늘어만가던 할머니께서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막걸리 한 잔이라도 드신 날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밭에서 김을 매다 호미에 묻은 흙을 털다가, 장독을 닦다 말고 먼 산을 쳐다보면서도 할머니의 혼잣말은 시도 때도 없이 늘어만 갔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를 두고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 망령이 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쑥덕거리고 손가락질을 하여도 나는 절대 아니라고 믿었다. 식구들을 못 알아본다거나 다른 사람을 해코지 하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대화 상대는 줄곧 돌아가신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낱낱이 해주는가 하면 힘들 때는 뼈 없는 욕까지 늘어놓으셨다. 어떤 날은 한밤중에 불현듯 5리나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 묘소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한참 있다가 돌아온 할머니의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해 전 설날 무렵이었다. 이른 새벽에 할머니께서 나를 깨우더니 부랴부랴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어젯밤 꿈에 니 할아버지가 뵈더구나. 무슨 일인지 몰라도 자꾸만 아침 일찍 산 밭에 나가보라는구나."
"에이, 할머니는 성가시게 맨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고 그래?"

산 밑에 있는 돌밭까지 가는 할머니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어디를 가든지 늘 할머니를 따르던 버릇 때문에 귀찮은 투정도 잠시였다. 산 밭까지 가는 총총걸음 내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나무라셨다. 왜 자꾸 꿈에 나타나서 성가시게 하느냐고 빈정거리셨다. 그렇게라도 찾아주는 할아버지를 못내 반기셨을 속내를 감추면서 말이다.

아직 잠이 덜깬 상태로 잔설을 털어가며 산 밭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어디인지 모르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할머니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영문을 모른 나는 어서 집에 돌아가자고 막 보채려는 참이었다. 그때 할머니께서 저만치 작은 소나무 밑동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거봐라, 이놈의 영감탱이가 거짓뿌랭이는 아니구만. 아야 얼른 저것좀 주워와라."

키낮은 소나무 밑동에는 꿩 두 마리가 죽어있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할아버지가 꿈속에서 할머니를 꿩이 있는 자리로 인도했다고 생각했다.

행여나 누가 볼까봐 꿩 한 마리씩을 감추고 부랴부랴 집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이웃 사람들은 극약이 주입된 콩을 꿩이 주워 먹고 그 자리에서 죽었겠지 하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 소문이 동네에 자자하게 퍼졌지만 꿩 주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설날 아침에는 단백하고 쫄깃쫄깃한 꿩 떡국이 밥상에 올라왔다. 그러나 밥상머리에 앉은 우리 식구들은 할머니의 말 한 마디 때문에 제대로 밥술을 들지 못했다.

"이 영감탱이가 죽어서도 꿩고기 때문에 한이 되었나벼. 아이구 짠해서 어짰으까잉."

덧붙이는 글 |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나갈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의 <징검다리 편지>와는 달리 주제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윤색도 할 것입니다. 이 짧은 글에 담겨진 환하고 맑은 마음이 징검다리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한 발, 한 발 건너갔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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