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결혼 기념일'을 지내며

등록 2003.01.10 11:52수정 2003.01.10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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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요즘 잠시 별거중이다. 아내는 지금 공주 친정에 가 있다. 지난 5일 오후 버스를 타고 홀로 떠났는데, 17일까지는 계속 친정살이를 할 모양이다.


나는 오늘 아침 7시경 공주 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시는 장인 어른께 문안 인사를 여쭙고, 아내와 통화를 했다. 전화기를 건네 받은 아내의 첫마디는 좀 엉뚱했다.

"아침에 웬일이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잘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오늘 아님감?"
"오늘이 오늘이라뇨?"
그런 아내는 잠시 후에 "으응, 난 또…" 하며 하하하 기쁜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16주년 결혼 기념일이다. 오늘도 16년 전의 그날처럼 눈도 오지 않고 비교적 온화한 날씨다. 눈이라도 오면 어쩌나, 너무 추우면 어쩌나 하고 조마조마했던 16년 전의 그 심정이 다시금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괜히 또 한 번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우리 부부는 결혼 기념일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아내가 공주에 있는 충남교육연수원에서 겨울방학 연수를 받게 된 사정 때문이다.


아내의 친정이 있는 공주에 충남교육연수원이 있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아내는 연수도 받고, 자식들과 따로 사시는 친정의 연로하신 부모님께 연수 기간이나마 공양도 해드리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아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 일거양득일 터이다.

아내는 오늘이 우리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라는 걸 깜빡 잊었던 눈치다. 내 비록 경제적으로는 무능한 남편이지만, 마누라도 깜빡 잊은 결혼 기념일을 스스로 챙겨서 아침 일찍 마누라에게 전화까지 해주었으니, 나도 그런 대로 괜찮은 남편일 것 같다. 아침 일찍 기분 좋은 전화로 마누라로 하여금 기쁜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으니, 나도 산뜻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한 셈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오후쯤 공주 처가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에 마누라를 충남교육연수원에 태워다주고 돌아오고 싶지만, 나는 오늘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오늘은 저녁에 성당에서 중요한 성가 연습이 있는 날이다. 일상적인 성가 연습이 아니라, 오는 14일 대전에서 사제서품을 받는 우리 태안본당 출신 두 번째 사제 방영훈(도미니꼬 사비오) 신부가 다음날인 15일 자신의 출신 본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는데, 이 첫 미사와 미사 다음의 경축행사에 부를 성가들을 연습하는 것이니 베이스 조장인 나로서는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신부님의 특별 부탁으로 오늘은 '축시' 짓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신부님은 처음엔 내게 '축사'를 부탁했는데, 13년 전인 1990년 2월 우리 본당 출신 첫 사제인 김한승(라파엘) 신부의 첫 미사봉헌·경축행사의 안내장에 나와 있는 내 축시를 보시더니, 이번에도 축시가 좋겠다며 축시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작업이 훨씬 수월한 축사 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결국 축시 짓는 일을 하게 되어서 오늘 하루종일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기쁘고 영광된 마음이다. 하느님께 개인적으로, 우리 성당 전체 차원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크다.

그러나 지금 집안은 좀 쓸쓸한 분위기이다. 아이들이 어제 강원도 춘천엘 가고 없어서 집안이 텅 빈 것 같은 기분이다. 성당의 중·고등학생부 겨울 캠프에 참가한 아이들이 오늘 집에 돌아오면, 오늘이 바로 자신들이 태어나게 된 계기가 된 날이라는 것을 알고 아빠에게 한마디 알은 체라도 하려나….

딸아이한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아들녀석까지 학원을 이틀씩이나 빠지게 하고 교회 행사에 참여시키는 일 때문에 고민을 좀 했다. 교회 행사로 며칠 전에도 하루 학원에 가지 못한 녀석은 오는 20일경에도 이틀 동안 청주교구의 '안중근학교'로 캠프를 가게 되어 있어서 정말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는 아이들에겐 학원 수업보다도 하느님 공부가 우선이라고 했다. 연일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방학을 이용하여 며칠 하느님 공부를 시키는 것인데, 학원 수업 때문에 그 귀중한 공부를 포기하게 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아내의 주장에 동의했다. 어머니도 찬성해 주셨다. 그래서 학원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하고 아들 녀석도 춘천에 보낸 것이었다.

학원의 정상 수업에 빠진 탓에 토요일 오후에 학원에 가서 보충 수업을 해야 하니 아들녀석의 고생이 좀 크겠지만, 학원 수업보다 하느님 공부를 더 중요시한 엄마 아빠의 바람대로 아이들이 춘천 캠프에서 가슴에 많은 것을 채워 오기를 바란다. 하느님 공부는 옳은 세상, 참된 삶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기초적인 가치관을 배우는 것이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을 익히는 일이니, 우리 가족 모두에게 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금요일, 우리 성당에 저녁 평일미사가 있는 날이다. 우리 부부의 16주년 결혼 기념일의 미사이니 당연히 '축복미사'를 봉헌할 생각이다. 아이들이 춘천에서 점심식사 후에 출발을 한다니까, 요즘은 길이 좋아 저녁미사 시간 전에 도착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이 돌아오면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아내는 지금 집에 없더라도 우리 가족은 또 한번 단란하고 오붓하게 하느님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가정이 '기초교회'라는 사실을 스스로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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