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산 정상에 텐트를 친 까닭

[성미산 일기 1] 왜 죄없는 성미산을 죽이려 하나요

등록 2003.02.03 01:23수정 2003.02.0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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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엄동설한에 텐트를 치고...

엄동설한에 텐트를 치고... ⓒ 이숙경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산에 올라와 보니 어디서 저런 힘들이 나오는지. 낮에도 하루 종일 산에서 홍보지 나눠주고, 애쓰던 사람들이 또 모여 앉아 있었다.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소주 댓병을 들고 올라온 해솔이 아빠가 빙긋이 웃으며 오징어를 굽는다. 타닥 타닥. 둥그런 화덕에 조개탄이 벌겋게 타오르고, 오징어가 오그라든다.

"야, 꼭 엠티 온거 같네!"

밤 열시가 넘었는데 윤진이네 부부는 애까지 데리고 텐트를 찾았다.
마포구 성산동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야 성미산. 이 산에서 우리 동네아저씨들이 추위에 떨며 이틀째 야영을 하고 있다.

"자, 한 잔 받아요."


음하하. 산사춘이다. 성미산 배수지건만 아니면 이 얼마나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연휴의 막바지 밤이냔 말이다. 다들 고향갈 준비에 정신없는 틈을 타서 산에 있는 나무들을 싹 베어버리는 바람에 동네에 난리가 났다.

연 이틀 텐트에서 밤을 보낸 권범이 아빠가 풀죽은 목소리로 "어제 방송국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데스크가 잘랐대요. 적법성에 문제가 없는지 확신이 안 선다구... 서울시에서 절차상 잘못한 부분이 없는 거 아니냐며 기사화하기 곤란하다네요"하며 핸드폰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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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활기를 찾으려 두런거리던 사람들이 권범아빠가 전한 비보에 일순 조용해졌다. 적법성이라. 성미산 소쩍새와 꾀꼬리, 박새, 오색딱다구리들이 터전으로 삼던 수많은 나무들이 죽어가는데...

평범한 서민들이 아침에 편안히 산보하고 운동하는 곳인데. 아이들이 매일 나들이 삼아 산에 올라 나무 한 그루, 언덕 하나에도 다 이름 붙여 놓은 곳인데. 나무 계단 하나, 운동기구 하나 하나 산에 정붙인 사람들 정성이 가득한 곳인데...

잘려 나뒹구는 나무들 옆에 세워진 텐트 주변엔 동네 어른, 아이들이 만들어 걸어놓은 포스터들이 빨래줄처럼 걸려 있다.

'성미산 사랑해', '아저씨, 성미산 죽이지 마세요', '우리가 물 좀 아껴쓰면 되는데 왜 죄없는 성미산을 죽여요!'

우리 동네 뒷산 '성미산'은 마포지역에 유일하게 남은 생태림이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도 동네 뒷산들이 있었다. 저녘 무렵 솔개가 날고, 가을엔 잠자리를 잡던 곳. 엄마 회초리를 피해 도망가 숨던 산등성이들이 배수지, 아파트로 변해 사라진 지 오래.

그나마 하나 남은 마포 성산동 뒷산 '성미산'이 지난 29일 새벽 아무도 모르게 벌목을 당했다. 잘려진 나무들이 성냥개비처럼 나뒹굴며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놀이터 한자락 없는 도심 한복판에서 아이들이 강아지처럼 맨발로 뛰놀고, 평범한 서민들이 새벽에 황토를 밟으며 건강한 숨을 내쉬며 달릴 수 있게 해주던 바로 그 나무들이 죄다 쓰러져 나뒹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제발, 살려주세요'

a 나무가 잘려나간 성미산

나무가 잘려나간 성미산 ⓒ 이숙경

그날 이후 동네 아저씨들은 산 정상에 텐트를 세웠다. 밤에도 스티로폴 한 장 깔고 텐트에서 새우잠을 자고, 낮에는 동네사람들과 구청, 시청 다니면서 기습적인 벌목을 막아보려고 발품을 팔았다. 말로는 배수지와 함께 공원도 만들어준다고 하지만, 두꺼운 시멘트로 뒤덥힌 배수지 위에 지금처럼 30년 묵은 나무들이 무럭 무럭 자랄 리 만무하고...

한여름에는 지리산 골짜기가 부럽지 않을 만큼 수목이 우거진 작은 뒷산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시멘트와 철기둥으로 세워진 놀이터에 비교할 수 없이 재밌는 숲속의 작은 공터들이 사라진다면, 우리 아이들은 봄이면 성미산에 어떤 꽃들이 피어나는지 기억할 수 있을까?

a 봄마다 개나리 가득한 성미산에서 놀곤 했던 우리 아이들.

봄마다 개나리 가득한 성미산에서 놀곤 했던 우리 아이들. ⓒ 이숙경

봄이면 성미산에 피던 꽃들

담장 위의 목련
성미산 개나리, 성서초등학교에도 있지요
다솜 놀이터의 벚꽃, 노란 산수유
어린이집 마당 앵두꽃
목련이 질 때쯤
집집마다 보라색, 하얀색 라일락
성서초등학교의 연두빛 은행잎
성미산 자락 밭에는 무꽃, 유채꽃, 마늘꽃.
산 가장자리에 철쭉, 진달래, 애기똥풀 노란꽃, 보라색 제비꽃
산 여기저기 하얀색 섬제비
성서초등학교 앞뜰에 명자나무 붉은 꽃
5월에 어린이집 당실방 창아래 진분홍 목단
6월에서 7월
성미산의 아카시아
하얀 찔레꽃
붉은 덩쿨 장미
아카시아가 다 지고 찔레내음과 장미내음이 가득하다.
성미산에는 빨간 뱀딸기, 계란꽃, 하얀 시계풀
학교가는 길 자귀나무 흰색, 분홍색 꽃술
무궁화
하얀색, 보라색 도라지꽃
동네에는 축축 늘어져 흐드러진 주황빛깔 능소화.


성미산 천막농성 일지

0일째. 1월 29일(수요일)

9시 벌목공사 시작 : 새벽 영하 14도까지 내려가는 추워진 날씨에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의 지침아래 효림종합건설(주) 노무자들은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을 거느리고 2시간 만에 성미산 정상 9000평을 메우고 있던 10-20여 미터가 넘는 30년 이상 된 수목 약 1000여 그루나무를 기습적으로 벌목공사. 나무가 베어진 성미산을 보면서 동네사람들 모두 슬픔에 목이 메어...

11시 30분, 구청장 항의방문 : 20여명의 성미산 지킴이는 기습적 벌목공사에 대해 마포구청장 항의방문. 구청장은 자신의 공약을 팽개치고 "물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공사를 중지시키겠다"말하고 죄지은 사람처럼 도망...

15시 30분, 서울시청 항의방문 : 동네사람들과 애들을 포함한 성미산 지킴이 30여명이 서울시청에 항의방문. 1시간 가량 항의 끝에 상수도사업본부와 면담하였지만, "벌목이 되었으니 이제 배수지 지어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지만 우리의 강한 항의에 일단 대책위와 협의 전까지 공사 중단하겠다고 구두로 약속함.

20시 30분, 전체대책회의 : 천막농성과 2월 4일 서울시청 항의방문을 결의. 그리고 설연휴 반납과 성미산에서 합동차례를 지내기로...

1일째. 1월 30일(목요일)

7시 천막농성 시작 : 추운 날씨에 모인 20여명의 지킴이들...베어진 나무를 보면서 눈 덮인 성미산 정상에 천막을 치고 농성장을 만듦.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사람들이 농성을 위해 갈탄난로, 탁자, 식기도구 등을 가지고 산에 올라옴. 성미산에 오신 주민들 잘려진 나무를 보며 분노했고 우리에게 따뜻한 격려의 마음을 보내주었다. 다음날부터 철야농성을 결의하며 첫날을 마감.....

20시 성미산 대책위원회회의 개최 : 전날의 전체대책회의 결정사항을 힘있게 집행할 것과 이후 지역주민과 함께 성미산을 지키기 위해 각 단위별로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할 것을 결의. 그리고 2월 4일 항의방문과 2월 8일 주민 촛불시위 결정. 천막농성단장(용빈아빠)도 결정되고...

2일째. 1월 31일(금요일)

다시 모인 지킴이들... 설연휴와 추위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보도자료를 만들고 적극적인 홍보활동을 전개. < MBC 특별한 아침 >과 <인터넷 언론-프레시안>에서 '설연휴 반납한 성미산 지킴이들'을 취재하러 옴. 천막농성장과 농성단원,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감... 오늘 하루도 갈탄난로는 더욱 따뜻하게 우리를 지켜줌. 저녘의 노을은 서편하늘을 너무나 붉게 물들이고... 철야농성에 3명의 지킴이들 새벽추위를 이기면서 성미산의 어둠을 밝혔다.

3일째. 2월 1일(토요일), 설날

10시 성미산 산제겸 합동차례 : 성미산 지킴이 30여명은 산제와 합동차례를 위해 단을 꾸미고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음식으로 차례상 차림. 성미산을 자연숲으로 지키기 위한 마음을 담아서 대책위원장이 제문을 낭독하고 절을 함... 원래 KBS에서 취재하기로 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서 2월 3일에 오기로 함... 우리의 뜻이 하늘에 통했는지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해짐.. .성미산에는 "성미산을 지켜내자"라는 구호가 가득 울렸다.

오후 : 설날이었는데도 많은 주민들이 산에 올라옴. 성산동에 사는 아주머니 한 분은 벌목된 성미산을 보고서 자신의 가슴을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슬퍼지만 의연한 성미산 지킴이들을 보고서 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함. 모금함에도 주민들의 성금이 모이기 시작하고, 다음날 있을 선전물도 준비하고... 두번째 철야농성 지킴이들 새벽추위를 이기면서 성미산의 어둠을 밝히다 분신할 뻔한 사고를 경험... 산신령이 보우하사 모두 무사함. 우리 생애에 이런 설날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으리라.

4일째. 2월 2일(일요일)

오전, 모여드는 사람들 : 더욱 포근해진 날씨속에서 설연휴를 일찍 끝낸 우리 성미산 지킴이들 애들을 데리고 오전부터 천막농성장으로 모여듦... 60여명의 지킴이들의 예술적 감각은 오늘 더욱 빛났다. 작은 문구들로 예쁜 포스터들을 만들고... 우리 모두의 소원을 담은 글들을 텐트 주변에 걸었다.

14시 동네 한바퀴 : 60여명의 우리 지킴이들이 성서초등학교 정문부터 피켓을 들고 '시청앞 주민규탄대회(2월 4일)' 홍보물을 붙이면서 성산동과 망원동 주변 주민들을 만남. 그리고 구청앞에서 구청장에게 최후 통첩. 선전전을 마치고 농성장에서 최대의 노동으로 명명된 '갈탄옮기기(30kg)'에 나선 지킴이들... 산에 오를 때마다 텐트야영을 위해 갈탄 한 가마니씩 나르고... 성미산의 천막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 오늘 성미산에 벌목 이후 최대의 인파가 모였다.

20시 성미산 텐트 농성장 : 8시부터 자정까지 동네 사람들 10여명이 천막을 지키고 아저씨 세 명이 제비뽑기로 당첨. 야영순번 정해서 공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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