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속의 '절 모양'을 깡그리 부수고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 (10) - 왕가봉 여래사

등록 2003.07.29 11:13수정 2003.07.29 18:31
0
원고료로 응원
사람들에게 절의 모습을 스케치하거나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그려낼까? 절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떨구지 못해 그런지 대개 기자가 생각하는 절의 모습과 비슷비슷한 그런 그림을 그려낼 듯싶다.

고건축 양식의 건물에 화려하기조차 한 단청 그리고 바람에 딸랑거리며 매달려 있을 풍경까지 꼭 같을 듯하다. 오래 된 소나무나 활엽수들이 숲 그늘을 만들어주는 좁다란 길을 따라 들어가게 되는 그런 분위기를 연상 할 듯하다. 졸졸졸 흐를 물소리를 만들어내는 계곡도 함께 하는 그런 주변의 전경도 그릴지 모르겠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며 수행하고 계시는 스님들의 모습과 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편안함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그려낼 듯하다.

a 여래사 진입로 양쪽의 야트막한 황토색 담장엔 작품 같은 조형들이 들어 있다.

여래사 진입로 양쪽의 야트막한 황토색 담장엔 작품 같은 조형들이 들어 있다. ⓒ 임윤수

이런 외양을 절의 모습으로 단정하고 있다면 그 단정이야말로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불과한 허구임을 일깨워주는 절이 있다.

호남고속도로 유성IC를 빠져 나와 공주 방향으로 1.5Km쯤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버섯모양에 탑 하나 삐쭉 올라간 황토색 건물이 보인다. 여느 산사들처럼 동네와 뚝 떨어져 있거나 산 속에 호젓이 절만 있는 게 아니고 대로 옆 주변의 주택들과 나란히 있기에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a 봉긋봉긋한 버섯지붕이 카페를 연상케 하지만 우뚝한 탑과 장승 등이 절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봉긋봉긋한 버섯지붕이 카페를 연상케 하지만 우뚝한 탑과 장승 등이 절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 임윤수

산 속에 있는 절의 진입로에서 맞게 되는 이런 저런 풍경이나 일주문, 천왕문과 같이 몇 몇을 거쳐야 하는 문들도 없다. 산사는 산사 나름대로의 모습들과 분위기가 있다. 산사는 오래 된 고목들에서 뭉툭뭉툭 묻어나는 태고의 자연스러움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산사를 찾으며 맞게 되는 자연의 그런 모습이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라면 여래사로 들어서는 짧은 진입로에 펼쳐지는 모습은 막힘 없는 공간에 전시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 같은 그런 분위기의 모습이다.


자연이 자연으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자연이 절제되지 않은 자유와 무형유형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작품엔 작가의 혼과 정성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작가의 혼과 정성이 스며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가공물이지 작품이라 할 수 없을 거다.

여래사는 입구의 담벼락이 작품이며 전각이 작품이다. 이곳 저곳에 자리하고 있는 장승과 장엄물들이 작품임은 물론 그 배치와 구도 자체가 작품이다.


a 탑을 들고 있는 스님을 형상화 한 조형물과 봉선화 잎새가 조화를 이룬 벽을 보고 있노라면 갤러리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 하다.

탑을 들고 있는 스님을 형상화 한 조형물과 봉선화 잎새가 조화를 이룬 벽을 보고 있노라면 갤러리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 하다. ⓒ 임윤수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물색하기 위해 전국 명지를 돌아다니다 계룡산을 찾아가는 길에 가마가 쉬었던 곳이라 하여 왕가봉이라 이름 붙여진, 계룡산 자락의 야트막해 보이는 왕가봉 남쪽에 여래사가 있다.

여래(如來)란 범어 다타아가타(tath gata)의 번역으로, 진리에 의하여 왔고, 항상 진리에 의하여 사시는 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 구속과 결박을 해탈하는 이, 위없이 가장 높은 이라고 하니 곧 부처님을 일컫는 말인 듯하다. 여래사는 곧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여래사로 들어서는 진입로 양쪽엔 황토색의 야트막한 담장이 나란하다. 꼭대기에 기와를 이고 있는 담장은 마치 갤러리의 전시 벽 같은 분위기다. 깔끔한 느낌을 주는 황토벽 군데군데엔 작품 같은 문양이 액자처럼 조형되어 있다.

a 마당 가운데 있는 장승은 이 절의 신장님이라도 되는 듯 하다.

마당 가운데 있는 장승은 이 절의 신장님이라도 되는 듯 하다. ⓒ 임윤수

작품을 감상하듯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서면 당황스러울 만큼 절하곤 상관이 없을 듯한 건물이 보인다. 한때 유행하였고 지금도 많이 운영되고 있는 버섯 지붕 형태의 황토색 건물이다. 버섯 갓처럼 동글동글한 모양의 지붕에 황토색 벽들이 기둥을 이룬 건물들이 봉긋봉긋 무리를 이루고 있다.

언뜻 보게 되면 흡사 카페나 음식점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우뚝 솟은 탑이 있기에 일반 음식점으로 생각하기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그런 구도를 하고 있다. 게다가 입구부터 계속되어 마당까지 도열하고 있는 장승과 석불에서 절임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절에 가면 당연히 대웅전이 있게 마련인데 이곳엔 대웅전 대신 황토색 건물에 <무설전>이란 편액이 걸려있을 뿐이다.

무설전이 무슨 뜻이냐고 주지 각림(覺林)스님께 여쭈니 "法法無法法 說說無說說 聞聞無聞聞 傳傳無傳傳 (법이라는 참된 법은 법 없는 법이요. 설법이라는 참된 설법은 설법할 것 없는 설법이니, 듣는다고 하는 참된 들음은 들을 것 없는 들음이요, 전한다고 하는 참된 전함은 전할 것 없는 전함이어라)"라고 알 듯 모를 듯한 설명을 해주셨지만 뭔가가 느껴지는 내용임엔 틀림없다.

a 다른 절들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이나 극락전은 보이지 않고 <무설전>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버섯지붕의 건물이 여래사 법당이다.

다른 절들에서 볼 수 있는 대웅전이나 극락전은 보이지 않고 <무설전>이란 편액이 걸려있는 버섯지붕의 건물이 여래사 법당이다. ⓒ 임윤수

아무래도 이렇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절을 짓게 된 데는 사연이 있을 듯하다. 자칫 법당에만 머물 수 있는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인 자비를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불자들이 근접하기 쉽게, 산 속도 도심도 아닌 이곳에 여래사를 건립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여래사를 창건한 주지스님의 속가 부친께선 스님의 출가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화를 가슴에 안고 돌아가셨다 한다. 부친의 그런 원혼을 달래며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불자의 근본에 충실하고 속죄하는 마음을 대신하고자 하신 듯하다.

속세와 모든 연을 끊고 생활하는 것이 출가자의 일반적 모습일지는 모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속가와의 인연을 외면치 않는 스님의 마음 씀이 성직자로의 고뇌와 인간으로의 갈등을 느껴지게 한다.

이왕 지을 것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런 형태의 고건축에 알록달록 단청된 절을 지을 수도 있었겠지만 경제성을 고려하여 이런 형태의 절을 지었다고 한다. 사실 고건축 양식으로 절을 짓게 되면 그 건축비가 만만치 않단다.

이에 반해 여래사와 같은 방식의 건축은 아주 경제적이라고 한다. 불자로서 지켜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주는 것과 받는 것 그리고 받은 것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청아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이 청아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대로 받을 수도 쓸 수도 없기에 경제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단다.

a 입석불과 스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토기 부처님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입석불과 스님이 직접 만들었다는 토기 부처님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임윤수

가운데 스티로폼이 들어있는 판넬을 넣고 시멘트로 양쪽을 보강하여 그 위에 황토를 바른 양식이라고 한다. 단열과 방음 그리고 적당한 보습효과까지 있다고 한다. 이런 형태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스님 스스로 수리와 보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 황토집이 좋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쉽게 황토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관리와 보수 유지에 필요한 능력과 노동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 한다. 시멘트 집이야 한 번 지으면 보수 유지가 거의 필요치 않지만 황토집은 반복해 바르고 덧발라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여건이 그렇지 못하고 노동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여래사 주지인 각림스님은 모든 것을 손수 하며 그것이 가능하기에 이런 형태의 황토집을 지을 수 있었고 요즘도 보수하고 황토를 덧발라 주는 것이 일상중의 하나라고 한다.

여래사를 들어서는 입구엔 헌 기와와 건축자재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여래사의 모든 건물 지붕에 얹어진 기와와 많은 목조들은 주변의 대형 사찰이나 고찰들이 개·보수하면서 발생한 것들을 얻어다 재활용 한 것이라 한다.

a 흙으로 구워만든 여래사의 모형이다. 본 건물을 건축하기 전에 흙으로 미리 모형을 만들어 보고 시공을 하였다 한다.

흙으로 구워만든 여래사의 모형이다. 본 건물을 건축하기 전에 흙으로 미리 모형을 만들어 보고 시공을 하였다 한다. ⓒ 임윤수

여래사의 99%는 스님이 직접 작업을 하신 결과물이라 한다. 콘크리트 타설 작업은 물론 벽돌쌓기, 장승제작, 조형물의 제작 및 배치 등 직접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절의 외양은 파격적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배우고 실천하는 데는 더없이 철저하다고 한다. 새벽 30시 30분에 올리는 아침예불로 하루를 시작한단다. 매일매일 고정관념 탈피를 위한 작업과 작품제작은 고행하듯, 참선하듯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신도들을 대상으로 불교 기초교리는 물론 다도와 도예 그리고 불화를 교육함으로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한다.

이판 사판

이판(理判) : 불교에서, 속세를 떠나 도를 닦는 데만 마음을 기울이는 스님.
사판(事判) : 절의 재산을 관리하고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스님.
/ 민중국어사전
"이판과 사판 중 어느 쪽이라 생각하시느냐"고 묻고는 자답하듯 "이판과 사판을 겸비하신 퓨전(fusion)스님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냐"고 하였더니 "퓨전이라기보다는 멀티(multi)라고 하는 게 더 좋지 않겠냐" 하시며 호탕하게 웃어 주신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딱 이구나"하는 동감이다. 차 한잔 마시며 둘러 본 방에서 바로 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 빼곡한 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갤러리에 전시된 것들인 양 다양한 작품들이 그렇다.

a 입구에 가지런히 쌓여진 헌 기와는 주변에서 얻어온 것이라 한다. 얻어 온 기와들은 여래사를 짓는데 활용되었고 보수와 유지에 재활용된다고 한다.

입구에 가지런히 쌓여진 헌 기와는 주변에서 얻어온 것이라 한다. 얻어 온 기와들은 여래사를 짓는데 활용되었고 보수와 유지에 재활용된다고 한다. ⓒ 임윤수

종단이나 어른 스님들께서 파격적인 절의 외양을 보시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여 여쭈었더니 아주 호의적이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한다. 특히 큰스님들께서 말이다.

그래도 궁금하여 다시 한번 여쭈었다. 절의 외양이 이러함에서 오는 어떤 어려움이나 오해 같은 것은 없는지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창조란 자칫 고정관념의 타킷이 될 위험을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고정관념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창조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어야만 한민족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듯 부처님을 모시는데 절의 외양만을 가지고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신다.

a 법당의 천장도 하나의 작품이다. 한지로 곱게 접은 종이 등이 윤회하는 인생처럼 원을 이루고 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쏟아질 듯한 별처럼 가슴으로 다가온다.

법당의 천장도 하나의 작품이다. 한지로 곱게 접은 종이 등이 윤회하는 인생처럼 원을 이루고 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쏟아질 듯한 별처럼 가슴으로 다가온다. ⓒ 임윤수

비록 머리엔 무스를 바르고 양복에 넥타이를 매었지만 한민족으로의 자긍심과, 선조 대대로의 가풍을 잘 보존함이 혈통에 대한 떳떳함을 더할 수 있다 하겠다. 절 또한 외양은 관념 속의 절 집 모양을 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고 생활화하려 하는 자세야말로 불자들이 추구하여야 할 구도자의 길이라 하신다.

법당에만 머무는 자비를 좀더 널리 알리고자 고정관념을 깨고 파격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자리한 여래사는 바로 창조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형태의 설법인 듯하다.

a 깨끗하게 정돈 된 법당<무설전>의 분위기가 두 손을 합장토록 한다.

깨끗하게 정돈 된 법당<무설전>의 분위기가 두 손을 합장토록 한다. ⓒ 임윤수

파란 눈에 커다란 코를 가져 이국적 외모를 갖고 계신 백인 스님이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른 삶을 살고 계실 때 그 스님을 우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영화에서 보았던 서산대사나 사명대사와 외양이 다르니 스님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외양은 머릿속에 그려왔던 스님의 모습과 다를지 몰라도 더 진지하게 부처님을 닮아가고 있다면 그이가 곧 큰스님 아닌가?

여래사는 창조가 강조되고 창조가 곧 경쟁력인 작금의 시대에 창조가 뭔가를 느낄 수 있고 화두로 삼게 하는 그런 곳이다.

여래사는 분명 깊은 산 속에 있는 산사는 아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고 이런 저런 이야길 듣다보니 산사에서 얻고자 하는 본연의 편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온갖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묶인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하늘을 지나는 가벼운 바람 같은 마음으로 한 번 다녀온다면 맑고 향기로운 절로 기억될 듯싶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