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모 연재소설 <수메리안> 22

등록 2003.12.22 10:56수정 2003.12.2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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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궁차지가 밖에서 아뢰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알았다. 곧 나갈 터이니 그리 알라."

태왕은 궁차지를 돌려보낸 후 다시금 에인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와 똑바로 다물린 입이 선왕을 닮아 있었다. 선왕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소성 쪽의 황하유역까지 영토를 넓힌 분이었다. 그쪽에 살던 토호와 부족들이 스스로 합류를 원해온 것이었다.

그분에게는 그런 신의 기운이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따르고 흠모하게 하는 힘…. 에인에게도 그것이 있으니 나이 어린 것을 먼 곳에 내놓는다고 안쓰러워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자, 갈 길이 바쁘니 이제 그만 일어서거라."

"마마, 소인이 돌아올 때까지 만수무강 하소서."


에인이 다시 하직 절을 올렸다. 그는 보지 못했으나 그때 태왕도 그에게 반절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동이족의 번영과 평화, 그리고 그를 이끌어갈 신기와 그 미래에 대한 축원 절이자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는 긴 작별의 인사이기도 했다.

에인이 천천히 일어나 다시 반절을 올리고 어전을 나왔다. 밖에 나와 보니 궁정마당에는 벌써 출정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정예군사 쉰 명과 선인 다섯 명, 그밖에 말과 마차 등이었다.


에인이 자기 말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말 등에 태왕으로부터 받은 궤짝을 실을 때 길게 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출정식이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그때 태왕도 나와 어전 앞 섬돌로 내려서고 있었다. 에인이 얼른 달려가 그 앞에 섰다. 태왕이 도열 행렬들을 주욱 둘러본 뒤 마침내 출정식을 시작했다.

"에인 장군 들어라. 그대는 이 태왕을 대신하여 멀리로 출정을 한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나 태왕의 권한을 주고자 한다. 이 권한을 받는 즉시 그대의 몸은 장군이자 또한 이 태왕이 되는 것이다."

그때 태자가 지휘봉을 들고 나와 두 손으로 태왕에게 바쳤다. 그것은 황소 뿔로 만들어진 긴 지휘봉이었다. 태왕은 태자로부터 지휘봉을 받은 뒤 큰소리로 말했다.

"이 지휘봉은 왕의 상징이다. 그러나 지휘봉을 빼면 검이 나온다. 그 검에는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신기가 서려있다. 다시 말해서 그 검은 전체를 통솔하는 장군의 명령만을 따른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그 소리를 들었다. 왕족이 가진 신검은 적이 접근하면 소리를 낸다던 바로 그 검인가 보았다. 태왕이 에인을 직시하며 말했다.

"가까이 와서 받으라."

에인은 두 손을 쳐들어 그 지휘봉을 받아들었다. 뿔의 거친 면은 곱게 연마되어 그 위에 왕조의 상징인 봉황이, 아랫부분 나무엔 용과 해의 그림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다시 태왕이 말했다.

"어서 빼들고 충정을 맹세하라!"

에인은 오른 손으로 황소 뿔을 단단히 부여잡고 휙 뽑아보았다. 장검이 그 속에서 나왔다. 그는 얼른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맹세를 했다.

"기필코 성공해서 돌아오겠나이다!"

태왕은 에인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제 네가 어떤 권위를 물려받았는지 모두들 알 것이다. 그 지휘봉 칼은 모든 통치권을 물려준다는 힘과 권위의 상징이다. 따라서 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진 못할 것이다.'

"이제 출발들 하라!"

태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 출정을 알리는 교각(북과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에인이 자기 말에 훌쩍 뛰어올랐다. 장수와 선인, 군사들도 뒤따라 말에 오르자 에인이 말을 툭 차서 선두로 나섰다. 태왕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는 탄복을 했다. 그 표정이 하도 엄숙해서 십년은 묵은 장수 같았던 때문이었다.

'과연 범상치 않구나. 이 며칠 사이에 어린 티마저도 마치 허물처럼 깨끗이 벗어버리다니….'

선인들이 에인의 뒤를 이어 궁문을 나가기 시작했다. 군사들과 마차도 그 뒤를 따랐다. 말은 모두 일흔 여섯 필이었고 동행할 인원수는 에인과 합하여 66명이었다. 그러니까 활이나 칼에 명수인 정예군사 쉰 명과 선인 다섯, 그밖에는 마차를 담당한 병사들이었다.

말은 마차 한 대당 두 마리씩 묶였고 열대의 마차 중 일곱 대에는 활과 활촉, 모(矛- 세모진 창) 등의 무기를, 다른 두 대에는 수놓은 비단 직포와 여우, 삵, 원숭이 가죽 등의 물품을, 나머지 한 대에는 야영할 때를 대비한 구비품들이었다.

직포와 짐승 가죽 등의 물품은 가는 도중 비상시에 유용하거나 그럴 일이 없다면 에인의 아버지에게 넘겨주면 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그리고 금 열 되와 자신들이 채굴한 묽은 옥 등은 나무 궤짝 두개에 단단히 봉해 무기마차에 함께 실었고 그 안전운반의 특별임무는 무술과 표창술에 뛰어난 책임선인에게 맡겨졌다.

그 금괴는 일행들과 함께 '딛을 문'까지 갈 것이었으나 현재로서는 그 내용물을 아는 사람은 태왕과 책임선인뿐이었다. 그 금과 옥들은 에인만이 쓸 수 있는 것으로 혹시라도 에인이 경제적인 문제로 '딛을 문' 제후에게 굽신거리거나 중요한 사안을 양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태왕의 은밀한 배려였다.

애초 태왕은 군사들 대신 선인 10명과 마차꾼들만 동행시킬 작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만약 에인이 나라를 가지게 된다면 먼저 필요한 것이 행정력이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일이고 당장 필요한 것은 안전한 운송이었다.

곳곳에는 반 유목민이나 수렵인들의 군거집단이 널려있고 그들은 자주 비적으로 돌변하기도 해서 일행들이 대월씨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무기를 빼앗기거나 변을 당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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