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룰라에 대한 편견과 오해

[대안칼럼-39] 참여정부가 좌파적 정책 폈다고?

등록 2003.12.30 14:40수정 2003.12.3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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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우리 사회의 각종 현안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분석과 대안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대안칼럼]을 내보내고 있습니다. 매주 2차례에 걸쳐 '대안연대회의' 소속 국내외 학계와 연구소 전문가 10여 명이 칼럼진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영국 켐브리지대 장하준교수(경제학)가 노무현 정부 출범 1년을 마무리하면서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브라질의 룰라정부와 비교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특히 장 교수는 보수진영에서 현 정부의 분배중심 경제정책 때문에 경기침체가 왔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구인지, 또 신자유적 경제논리에 휩쓸린 노 정부의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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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일 룰라 대통령 당선자가 브라질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기 위해 취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 AP/연합뉴스

2002년의 극적인 선거전에서 노무현 후보가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 당선된 지도 한 해가 막을 내리고 있다. 노무현 후보는 광주사태 청문회 때 날카로운 논리로 군부를 몰아세운 전력을 가지고 있고, 운동권 출신의 참모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등 한국적 맥락에서는 진보적 성격이 강하다고 여겨지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노 후보가 당선되자, 자연스럽게 그를 그보다 두 달 전인 2002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된 좌파 노동자당(PT)의 루이즈 이나씨오 다 실바 (Luiz Incio da Silva), 일명 '룰라'(Lula) 후보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룰라 후보의 당선은 사실 노무현 후보의 당선보다 몇 배 더 놀라운 일이었다.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하고 계급구조가 고착되어 있는 브라질에서, 초등학교만 나오고 일선 노동자로 일하다가 산재(産災)로 손가락까지 잃은 노조지도자 출신의 룰라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많은 브라질 사람들은 이것이 유럽인들에 의한 브라질의 식민화 이래 지속되어 온 '500년간의 불의(不義)'를 뒤집어준 역사적인 일이라고까지 평가하였다.

@ADTOP@
노무현의 경제정책 때문에 경기침체?

최근 들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늘어나면서 그와 룰라 대통령간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보수진영에서 많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룰라는 좌파적 정책을 버리고 친(親)시장주의로 방향을 선회하여 브라질 경제는 잘 되고 있는데 반하여, 노무현은 성장보다 분배를 중시하는 좌파적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우리 경제는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인가?

이러한 분석의 무엇보다도 큰 문제점은 룰라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기본적 성격이 유사하다는 기본 가정 자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룰라정권은 '노동자당'이라는 노동운동·농민운동 등에 강한 풀뿌리 조직을 가지고 있는 진정한 대중정당에 기반한 정권이다. 이에 비해 노무현 정권은 민중조직에 뿌리가 거의 없는 정권이고, 따라서 그 진보성이 매우 취약하다.

보수파에서는 "노정권이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요시하여 경제를 망친다"고 노무현 정부를 비난하지만, 실제 노정권이 소득재분배를 위해 한 일은 거의 없다. 부동산 보유 및 양도세 강화 정도뿐이다. 노 정권의 정책들을 보면 규제완화·민영화·자본시장 개방·외국자본에 대한 우대·법인세 감면·노동시장 유연화(즉, 비정규직의 증대) 등 진보와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 정부, 진보와는 거리가 먼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주류

노무현 정권이 진보적으로 비추어지는 주된 이유는 재벌에 대한 제동을 많이 걸기인데, 이것도 과연 진정으로 진보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노 정권의 재벌통제는 (1인1표의 원칙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적 통제가 아닌 (1주1표의 원칙에 기반을 둔) 주주권을 통한 통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조들마저도 재벌과 싸우기 위해 소액주주권리 강화를 주장할 정도로 주주자본주의가 진보적인 정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실제로 노동자의 이익과 크게 배치되는 정책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우파세력들, 그것도 금융자본에 우호적인 세력들이 주로 추구하는 노선이다.

물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무현 정부가 실제로 편 정책들은 국내외적 제약에 의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더 보수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 룰라 정권도 집권 이후 GDP의 57%에 이르는 국채의 부도를 내지 않기 위해서 GDP의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이자를 지불해 왔고, 이를 위해 고이자율 정책을 유지하고 엄청난 긴축재정(이자지급 비용을 제외하면 정부재정 흑자는 GDP의 5%에 해당)을 운영하는 등 거시경제 정책에서는 보수적 노선을 추구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룰라 정권은 전투기 구입계획 취소, 정부 운영비 절감 등을 통해 자원을 마련하여 소위 '기아제로'(fome zero) 정책을 펴면서 결식가구 중 130만 가구에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하고 있고, 360만 빈곤가정에 '가족수당'(bolsa familia)을 제공하는 등 빈곤층 구제에 힘을 쓰고 있다.

또 지주세력이 강한 브라질의 정치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100만여 가구에 토지를 유무상으로 배분하거나 저리의 영농자금을 융자를 해주는 토지개혁 프로그램도 준비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이렇게 룰라 정부처럼 과연 '진보적인 복안'을 가지고 현실의 제약을 수용하면서도 최대한으로 그를 추구하려 하였는가는 의문이다.

@ADTOP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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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기 위해 취임식장에 들어서고 있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룰라 정부의 빈곤층 구제와 토지개혁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적되어야 할 것은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이 주장하는 것처럼 브라질 경제가 잘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룰라 정부의 성공'을 말하는 사람들이 주로 인용하는 것은 브라질 증권시장의 호황인데, 정말로 국가경제의 미래와 일반대중의 삶을 생각한다면 중요한 것은 주가(株價)보다는 성장과 고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룰라 정부의 첫 해는 큰 실패였다.

2003년 브라질의 경제성장률은 0%선으로 예측된다. 인구 증가율이 1.4%가량이니 1인당 소득은 1.4%가량 줄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금융소득의 안정을 위해 물가안정 위주의 거시경제 정책을 펴다 보니 실질이자율이 아직도 8~10% 가량이나 되어 투자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실업률은 13%이고 실질임금은 지난 1년간 약 15%나 떨어졌다고 한다.

금융자본의 입장에서는 성공이었는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명백한 실패이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공사례'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룰라 정부도 이러한 경제의 실패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前) 정권이 남겨 준 국채가 워낙 많고, 금융 자본가들이 룰라의 노동자당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신이 워낙 컸기 때문에, 최소한 첫 해에는 이러한 보수적인 정책들이 불가피했다는 것이 룰라 대통령을 비롯한 각료들의 변명이다. 그리고 아직도 70%대를 유지하고 있는 룰라 대통령의 지지도를 보면 일반 국민들도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수는 없다. 대중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민생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하고 2급수니 4급수니 하며 (상대적) '도덕성'이라는 차원에서 정치게임을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와는 달리, 풀뿌리 조직이 강한 정당에 기반한 룰라 정부는 민생문제를 최우선으로 삼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풀뿌리 조직을 가진 룰라 정부의 과제

따라서 룰라 정부가 내년 중에 노선을 수정하여 이자율을 더 낮추어 투자를 촉진하고 그를 통해 1~2년 내에 성장과 고용을 창출해 내기 시작하지 않으면, 그의 정권은 당내부의 반발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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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켐브리지대 장하준 교수 ⓒ 오마이뉴스

물론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GDP의 10% 달하는 국채에 대한 원리금 상환 부담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룰라 정부는 기존 국채 상환의 연기나 금리 인하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금융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룰라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정책노선의 수정이 없이는 정권의 존립이 위태롭다.

주식시장이나 여타 금융지표만 가지고 브라질 경제가 잘 되고 있다고 하는 보수파 논객들도 문제이지만, 전체적인 정책구도는 일반 국민을 힘들게 하는 신자유주의로 가져가면서 재벌총수 몇 명 잡아가두고 외국자본에 재벌기업 몇 개 매각하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노무현 정부도 문제이다.

진정으로 국민다수를 위하는 진보적인 정책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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