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명의 성스런 스님들이 머물던 절

걸망에 담아온 산사이야기(38)-팔공산 팔성사

등록 2004.02.10 08:43수정 2004.02.1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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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험상궂은 표정의 금강장사가 마음을 지켜보는 듯하다.

험상궂은 표정의 금강장사가 마음을 지켜보는 듯하다. ⓒ 임윤수

중학교를 다닐 때 일이다. 2학년 재학 중 전학하여 처음으로 새 학교에 등교했는데 누군가 '윤수야!'하고 부른다. 알만한 사람이 없는데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옆에 있던 또래가 '왜'하고 대답을 한다.

그때서야 이 세상엔 나 외에 다른 '윤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네 전부가 일가친척인 집성촌인 탓에 큰집과 작은집, 당숙과 재당숙, 외가와 사돈 등으로 얼키설키 연을 달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자란 우물안 개구리인 나에게서 윤수는 이 세상에 하나 뿐인 독보적 이름인줄 알았다.


국어 책에 바둑이 친구 영희가 나오고 담임선생님 이름이 영희였지만 그것은 그냥 책에나 나오는 것이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만나고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망상이 한 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그 후에 전화번호 책을 뒤져보고 윤수란 이름이 정말 흔하다는 것을 알았다. 동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그 친구는 중학교 2년 동안을 한 반에서 함께 생활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함께 경험해야 했다. 동명(同名)은 가끔 사람을 헛갈리고 당혹스럽게 한다.

a 눈밭의 뽀얀 부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눈밭의 뽀얀 부도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 임윤수

절 이름도 같은 게 부지기수로 많다. 어떤 이름은 전국적으로 수십 군데나 된다. 그러니 자칫 어떤 절을 말하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전혀 엉뚱한 절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 큰 규모에 속하는 '쌍계사'란 절만 하더라도 그렇다. 지리산 자락인 하동에 쌍계사 있는가 하면 전남 진도와 충남 논산 등에도 쌍계사가 있으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기사의 제목에 나오는 '팔공산'을 보고 십중팔구는 대구에 있는 팔공산(八公山 : 1192.9m) 일 거라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팔공산은 경북 대구에도 있지만 전북 장수에도 팔공산(1151.0m)이 있다.

전북 장수엔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뛰어 든 주논개의 사당과 생가가 있다. 꽃다운 스무 살 나이에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의암으로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가 태어난 곳이 바로 장수다.


양성평등이 주창되면서 많은 여성들이 정·재계를 포함한 사회적 지도층에 두드러지게 진출하고 있다. 지도층에 입문하려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 번쯤 본받으려 해 봄직한 인물이 논개 아닌가 모르겠다. 논개는 고관대작의 사대부 집 딸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을 출생지로 두고 있는 아녀자임에도 기꺼이 제 몸 불살라 의를 행했다.

a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삼성각이 보인다.

대웅전과 극락전 그리고 삼성각이 보인다. ⓒ 임윤수

그러기에 만해 한용운은 '논개의 애인이 되어 그의 묘(廟)에'란 글로 그를 예찬했으며 논개의 순절을 기리는 마음은 결국 대중가요까지 등장하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 그런 말을 하였다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 손가락질 당하기 십상이지만 어릴 때 여자들이 해야 할 일, 부엌일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등 사내녀석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하면 할머니들의 호통 담긴 조롱이 뒤따랐다. 다름 아닌 '계집이 하는 일을 남자가 하면 불알 떨어진다'는 말씀이었다.

대범하지 못하고 씩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계집만도 못한 녀석이라 호통하며 불알을 떼어버리라'고도 했다. 불알은 남성의 생식기적 표현이지만 남자로서 지켜야 할 의(義)와 도(道)그리곤 체면(體面) 등이 농축된 상징이었음이 분명하다.

행동을 어떻게 하든 생식기인 불알이 떨어질리 없지만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또 다른 표현이자 격려였으리라. 남자답게? 글쎄 남자답다는 게 무언지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선비정신, 꼿꼿한 지조 그리고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의로움도 포함된 뭔가를 말한 게 아닌가 모르겠다.

a 대웅전 양옆에는 옴마니반메홈이 양각된 순동제 회전체가 있었다.

대웅전 양옆에는 옴마니반메홈이 양각된 순동제 회전체가 있었다. ⓒ 임윤수

그 할머니들이 생존해 작금의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분명 그 소릴 또 할 듯하다. '저 계집만도 못한 놈들' 하고 혀를 끌끌 찰 게 분명하다. 아무리 어제의 동지가 오늘날 원수 되고 동지가 원수 되는 게 정치 판이라고 하지만 이합집산에 패륜적 배신을 밥먹듯 하니 말이다.

남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가끔은 남자임을 부끄럽게 하는 여성이 꽤나 많다. 그런 여성엔 이미 운명을 달리해 역사적 인물이 된 사람도 있지만 한 시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여성 중에도 분명 있다.

그런 여성중의 한 명, 논개가 태어난 장수는 무주, 진안과 인접해 있다. 이 세 고장을 통틀어 '무진장'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꺼먹돼지와 사과 그리고 흑두부가 유명한 장수엔 팔공산이 있고 팔공산에는 팔성사(八聖寺)라는 절이 있다.

장수IC를 나와 장수읍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재를 넘어야 하는 고갯길을 따라야 한다. 재에 올라서면 장수 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산자락을 행주치마처럼 두른 작은 읍 소재지로 옴폭 패인 분지형 지형이다. 불어오던 바람도 멈추고 흘러가던 구름도 쉬어갈 듯한 그런 산세가 읍내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a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님을 모셨을 삼성각이 절의 규모에 비해 큰 편이다.

산신과 칠성 그리고 독성님을 모셨을 삼성각이 절의 규모에 비해 큰 편이다. ⓒ 임윤수

장수읍내를 벗어나 주논개 생가입구를 지나 남원 쪽으로 한참을 가다 팔공산을 바라보면 저만치 산 중턱에 산사가 보인다. 이정표를 보고 포장된 농로와 산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주차장이 나온다. 산사 가는 길이 대개 그러하듯 들어가는 길은 한적하다. 그냥 길 따라 들어가면 된다.

팔공산 기슭에 자리잡은, 한때 운점사(雲岾寺)라고도 불렸던 팔성사(八聖寺)는 백제 무왕 때(603) 해공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행을 했던 곳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버글거릴 때를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표현하는데 이 야단법석이란 표현이 당시의 신조어로 등장한 배경엔 원효대사의 설법 풍경에서 시작되었다.

원효대사가 양산에 있는 내원사에 머물 때 천여 명의 중국 스님들이 찾아와 설법을 청하였다고 한다. 암자의 터가 비좁아 어쩔 수 없이 대사는 뒷산의 넓은 벌판에 야외불단(野外佛壇)을 세우고 법좌석(法座席)을 마련하여 화엄경을 설했다.

a 대웅전 앞 회전체의 글씨와 극락전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 앞 회전체의 글씨와 극락전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 임윤수

그렇게 되니 이때부터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때의 풍경, 야외에 불단을 차려놓고 법좌석을 마련하여 화엄경을 설법하던 야단법석(野壇法席)과 같다하여 '야단법석'이란 말을 사용하게 된 것.

내원사에서 야단법석이 있은 후 대부분의 스님들은 중국으로 돌아갔으나, 8명의 스님은 원효대사를 따라 계속하여 수도의 길을 따르겠다고 하여 팔공산으로 들어와 함께 거주하게 된다. 이때부터 8명의 귀한 손님들이 살고 있는 산이라고 하여 그 산은 '팔공산'이라 불렀다.

남아있는 8명의 스님 모두가 성스러운 스님들이니 그들이 머물던 절 이름은 팔성사(八聖寺)라고 하였으니 그 절이 현재의 팔성사다. 또한 팔공산은 성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라 하여 성적산(聖積山)이라 칭했다고 전해진다.

a 흰눈 속 산사는 정막감이 들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흰눈 속 산사는 정막감이 들 정도로 조용하기만 했다. ⓒ 임윤수

비탈진 산길을 오르느라 자동차가 굉음을 낸다. 동절기 휴식삼매에 들어있을 나무와 산짐승을 희롱하는 듯해 미안함이 앞선다. 유달리 눈이 많기로 알려진 곳이라 응달진 곳을 지날 땐 빙판이 걱정된다. 눈 녹은 물조차 멈출 새 없이 흘릴 만큼 급경사인 탓에 결빙된 곳은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제일 먼저 잘 정돈된 주변의 소나무들이 눈길을 끈다.

붉은 껍질에 구불구불 멋대로 자랐지만 어릴 때부터 손질을 하였는지 거슬리는 가지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나무사이 저 만큼에 원색의 단청이 보인다. 눈이 내린지 며칠이 지났건만 응달진 곳은 수북한 눈밭이다.

사악한 생각이라도 하면 와락 덮칠 것 같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금강장사가 양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비탈지고 휘어진 길을 조금 오르니 왼쪽으로 뽀얀 부도가 눈밭에 보인다. 부도의 깨끗함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이 짐작된다.

부도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좌측이 되는 산 쪽으로 사람 한 길 높은 위치에 대웅전이 있고 그 우측에 삼성각이 있다.

a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 선방은 응달진 곳이었고 주변의 눈이 그대로 있었다.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 선방은 응달진 곳이었고 주변의 눈이 그대로 있었다. ⓒ 임윤수

대웅전 전면 양쪽에는 드럼통 형태의 순동제 회전체가 놓여져 있다. 아주 작은 힘으로 돌려도 부드럽게 돌아가는 그 회전체에는 '옴마니반메홈'이라는 진언이 범어(산스크리트)로 양각되어 있다.

'옴마니반메홈'이란 "당신의 거룩한 꽃 속에 나 온전히 안기나이다"란 뜻이라고 하니 속세의 모든 악연을 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다는 뜻인 듯하다. 진실한 마음으로 진언이 양각된 이 회전체를 돌리며 한가지를 소원하면 반드시 이루게 된다고 한다.

구리판을 둥그렇게 감고 글씨를 양각하여 만든 이 회전체를 돌린다고 요술방망이에서 '뚝딱' 하고 소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리는 없을 것. 그러나 그렇게 소원하며 진실한 마음을 가지다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면 뭔가를 깨닫거나 지혜를 얻게되니 그것이 곧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의 길이 아닌가 모르겠다.

대웅전 우측엔 여느 절들과 마찬가지로 삼성각이 있고, 그 옆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산상의 별장처럼 작은 선방이 있다. 한 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막힘이 없으니 그 곳에 앉으면, 꽃 피고 눈 나리는 가운데 자아를 놓게 될 듯하다.

a 원두막형태의 초가가 한여름의 더위를 떠올리게 한다. 옆으론 바위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별도의 선방이 필요 없을 듯 하다. 이곳이 곳 선녀 골이며 무릉도원일 듯하다.

원두막형태의 초가가 한여름의 더위를 떠올리게 한다. 옆으론 바위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별도의 선방이 필요 없을 듯 하다. 이곳이 곳 선녀 골이며 무릉도원일 듯하다. ⓒ 임윤수

대웅전 정면, 사람 한 길만큼 낮은 곳 왼쪽으론 극락전이 있고 한 단계 더 낮은 곳엔 공양간과 기도하며 기거할 수 있는 숙소가 있다. 공양간 앞쪽으론 고사된 듯 거무튀튀한 아름드리 호두나무가 유구한 세월을 느끼게 해준다.

대웅전 좌측에는 원두막 형태의 초가가 있고 그 옆 바위로 물줄기가 골을 이루고 있다. 한 여름, 등줄기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 더위 속 여름, 초가의 그늘에 앉아 흐르는 물 바라보며 경이라도 한 줄 읽답보면 예가 곧 선녀골이며 무릉도원일 듯하다.

별도의 선방이 필요 없을 듯하다.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르는 물에서 하심(下心)을 보게되고 불어오는 바람에서 덧없음을 알게되니 무엇을 더 깨우치랴. 물에 덤벙 적신 옷가지는 바윗돌이 금방 말려줄 게 틀림없다. 산나물이라도 뜯어 펼치면 건조대가 되고 등대고 누우면 침상이 될 듯하다.

기둥만 남아있는 소나무 사이로 잘 정돈된 들녘이 보인다. 경내에서 먹고 마신 것이라곤 흐르는 물 조금뿐인데 배가 고프지 않다. 가슴에선 맑은 공기가 아삭아삭 씹히고 답답한 머릿속엔 퐁당하고 퍼지는 물결처럼 후련한 뭔가가 너울을 만든다.

a 깡동하게 기둥만 남아있는 소나무사이로 잘 정돈된 들녘이 시원하게 보인다.

깡동하게 기둥만 남아있는 소나무사이로 잘 정돈된 들녘이 시원하게 보인다. ⓒ 임윤수

비탈길 내려와 금강장사 옆을 지날 땐 무심코 주머니 속 두 손이 꼼지락거린다. 그리곤 할머니들이 말씀하시던 사내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되뇌게 된다. 그것만 달렸다고 사내라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곤 혀 끌끌 차며 불알 떼어내란 소릴 하지 않을지 내심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 팔성사 찾아가는 길
대전-진주간고속도로 - 장수IC- 장수읍내 - 19번국도 남원방향 - 이정표

덧붙이는 글 팔성사 찾아가는 길
대전-진주간고속도로 - 장수IC- 장수읍내 - 19번국도 남원방향 -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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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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