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만들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과연 필요하고 온당한 법인가

등록 2004.07.22 10:56수정 2004.07.2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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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찍이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함께 해외 여행을 하는 꿈을 가져왔다. 이미 1990년대 후반에 가족들의 5년짜리 여권을 모두 마련해 놓았다. 그때는 내가 매월 200만원씩 한창 빚잔치를 하며 살던 시절이었다. 그 눈물겹던 시절에 무슨 오기로 그랬는지 가족들의 여권까지 마련해 놓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난다.

1996넌 처음 여권을 취득했던 나는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가톨릭문우회'와 '한국소설가협회'의 행사에 참가하여 90년대에 두 번 외국 여행을 해볼 수 있었다. 96년 홍콩·마카오·신천 여행 때는 처형의 도움을 받았고, 97년 호주 여행 때는 경비 전액을 누님이 대주었다. 그렇게 혼자 외국 여행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참으로 컸다.

보증 빚의 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내가 맨 처음 한 일은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여행한 일이었다. 1999년 2월 말 '봄방학' 때 있었던 일이다.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는 그때 비행기를 처음 타보았다.

초등학교 교사로서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해외 여행 기회들이 있었는데도 모두 외면하고 1999년에서야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아내를 보며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노년에 이르러서야 역시 처음 비행기를 타보시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죄스러움이 한량없었다.

그때의 제주도 가족여행에는 두 생질 아이도 동행을 했다. 먼 이국에 가서 살고 있는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와 생활하는 중학생과 초등학생 생질 형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용 전액을 내가 부담하고 두 아이도 함께 데리고 가서 3박 4일을 즐겁게 지내고 왔다.


그때 제주도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서 불원간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외국 여행을 하는 기회를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쉽게 만들 수가 없었다. 2001년 어머니가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후 설사 후유증을 겪게 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외국 여행을 한다는 건 바랄 수 없는 일인 것만 같았다.


나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한 사람이 필리핀 아가씨와 결혼을 하게 되어 2002년 초등학생이던 아들녀석과 필리핀 구경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난해 8월에는 대전평화방송 사장 방윤석 신부님의 주선으로 3박 4일 동안 연변과 백두산을 보고 왔는데, 어머니를 남겨두고 4명 가족만 함께 하는 여행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도 모시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연길에서 백두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고 오는 길이, 또 지프를 타고 백두산을 오르는 일이 팔순 노인에게는 무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포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어머니를 모시고 천안 성거산 성지와 독립기념관을 갔는데, 그 넓은 독립기념관을 팔순 노인네가 너끈히 돌아다니시는 것을 보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어머니가 더 연로해지시기 전에 내년쯤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가족 외국여행을 계획, 추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먼 나라는 가지 못하더라도, 어머니 생전에 온 가족이 함께 가까운 중국이라도 여행을 해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나는 올해 그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내 글쟁이 명색의 수입이 별로 덩두렷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내년에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 하는 과제가 걸려 있지만, 당장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우리 집 다섯 식구만 여행을 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는데, 1999년 제주도 여행 때처럼 아내가 또 생질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마침 내게 돈 나올 구멍도 하나 생겨나고 해서 이번에도 생질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내가 비교적 자주 피붙이 겨레붙이 인연붙이들에게 띄우는 '가족메일'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가운데 제수씨와 두 아이, 경기도 안산에서 사는 누이와 딸아이도 이 뜻 있는 행사에 동참하기를 희망해왔다. '어머니와 함께 하는 가족 여행'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관심을 표했다. 어머니 생전에 언제 또 그런 기회가 있겠느냐고,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찌감치 중국의 '북경/만리장성 3박 4일 상품'을 마음속에 정해놓고 여러 여행사에 문의를 해본 결과 8월 20일까지는 성수기로 치기 때문에 20일 이전과 이후의 금액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나는 시점과 맞물리는 사정 때문에 몹시 고심을 하다가 결국 8월 21∼24일을 선택했다. 세 아이 모두 8월 23일이 개학날이어서 이틀 결석과 관련하여 담임 선생님들께 일일이 전화로 일찌감치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여행사와의 전화 상담 과정에서 성인 10명이 채워지면 별도 단체가 되어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분 사촌형수님들께 참여를 요청했다. 어머니 생전에 어머니 모시고 가까운 중국 여행 한 번 하려고 한다는, 또 이런 행사에는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붙이들이 참여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내 말에 감동을 했는지, 두 분 사촌형수님이 동행하기로 했다. 몸이 불편하신 두 분 사촌형님들께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지만….

이렇게 해서 어른(중학생 포함) 11명에 초등학생 3명, 합 14명의 아주 적당한 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비용은 일인당 54만원이 되었다(초등학생은 10% 할인).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14명 모두의 여권을 빨리 모아서 여행사에 넘겨주는 일이다. 아직 여권이 없는 사람들은 속히 여권 신청을 하도록 했다.


(2)

그 여권 신청을 위해 지난 9일 천안에서 대학을 다니는 생질이 태안에 왔다. 천안 시청에 가서 신청을 해도 되는데 그걸 몰라서 태안에 오게 했지만, 다음의 일들로 말미암아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대학생 생질은 방학에도 집에 오지 않고 계속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이었다. 자동차 정비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일당이 3만원이라고 했다. 그 수입으로 그는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고, 또 동생의 학원비를 내고 생활비에 보태 쓰라고 할아버지께 방학 두 달 동안 40만원씩 보내 드린다고 했다. 생각하면 참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운 일이었다.

하여간 녀석은 일당 손실을 감수하면서 태안에 왔다. 일단 우리 집으로 와서 내가 미리 군청에서 가져다놓은 여권 신청서에 기록을 했다. 그 여권 신청서와 함께 천안에서 찍어온 여권 사진을 가지고 군청 민원실로 가서 여권 담당 직원에게 주기만 하면 일이 다 될 줄로 알았다.

그런데 미성년자인 동생의 여권 신청을 형인 자신이 해도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군청 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고 문의를 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84년 생인 그는 군대 징집 연령에 걸려 있기 때문에 먼저 병무청으로부터 '국외여행허가서'를 받아야 여권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84년 생부터 86년 생까지 거기에 해당된다고 했다.

내가 대전병무청으로 전화를 걸었다. 녹음된 안내를 따라 단추를 몇 번 눌러서야 겨우 담담 여직원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병무청에 '국외여행허가'를 신청하려면 호주(戶主)의 인감증명원과 재산세 납부증명원, 보증인 2명의 인감증명원과 재산세납부증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호주와 보증인 1명, 또는 보증인 2명의 재산세 일년 납부 금액이 합 15만원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생질의 집은 할아버지가 호주이므로 호주의 서류를 떼는 일은 문제가 아니었다. 보증인 한 명은 당연히 아내 몫이었다. 나는 과거 담보 제공을 해준 탓에 법원 경매로 넘어간 우리 집을 눈물겨운 과정을 거쳐 되찾을 때 아내 이름으로 명의 변경을 해놓았기 때문에, 즉 재산이 전혀 없는 백수 건달이라서 보증인이라는 건 내게 해당되지 않는 사항이었다.

그래도 지역에서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 아내가 직접 읍사무소에 가지 않고 내가 대신 가더라도 아내의 서류들을 뗄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의 일년 재산세 납부 금액은 오만원 수준이었다. 그것은 생질의 할아버지도, 또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두 집을 합친 일년 재산세 납부 금액이 15만원을 넘게 하려면 다른 친지에게 보증인 부탁을 해야 했다. 다행히 그 일은 쉽게 해결이 되었다.

호주인 할아버지, 그리고 두 명 보증인의 인감증명원과 재산세 납부증명원을 확보한 생질은 다음주 월요일(12일) 새벽 첫 버스로 대전엘 갔다. 대전병무청에 가서 서류를 접수하고 오전 중으로 천안으로 가서 오후 아르바이트 작업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전병무청에 간 생질은 거기에서 본인이 직접 작성하는 서류에도 호주와 보증인들의 인감도장이 찍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0일 별세하신 서울 작은아버지의 유해를 모시고 12일 고향으로 내려오는 영구차 안에서 나는 생질의 전화를 받았다.

생질은 그 서류를 팩시밀리로 보낼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럼 큰외숙모에게 전화하여 태안초등학교 팩시밀리 번호를 알아 가지고 일단 큰외숙모에게 서류를 보내라고 했다.

결국 아내가 그 서류를 받아서 생질의 할아버지와 다른 한 명 보증인의 인감 도장을 받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서류를 다음날 13일 천안의 생질에게 '등기 빠름'으로 우송했다.

생질은 그 서류를 15일에 받고서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17일에서야 대전병무청에 가지고 갔다. 미리 전화로 담당 직원에게서 토요일도 오후 1시까지 근무를 한다는 말을 들은 탓이었다. 생질도 그 담당 직원도 17일이 제헌절 공휴일이라는 것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생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전병무청에 와보니 민원실 문도 잠겨 있고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휴대폰으로 대전병무청 전화번호를 눌러보라고 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있으면 당직 근무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결국 생질은 당직 근무자를 만나 서류를 맡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19일) 대전병무청 담당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담당 직원은 토요일의 당직 근무자에게서 서류를 전달받았음을 말하고, 병무청장의 '국외여행허가서'가 나오는 즉시 우편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생질은 어제(21일) 대전병무청의 서류를 받았고, 오늘 천안시청으로 가지고 가서 여권신청을 했다고 내게 전화로 알려왔다. 무려 근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다소 복잡한 과정이 결부되었던 대학생 생질의 여권 신청 작업은 일단락이 된 셈이다. 그 작업에는 본인은 물론이고 할아버지와 두 명의 보증인,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의 수고가 곁들여졌다.


(3)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군대 징집 연령에 도달한 젊은이들이 여권 신청을 할 때 먼저 병무청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국외여행허가'라는 것, 그게 꼭 필요한 것일까? 그 제도가 과연 온당한 것일까?

내가 굳이 대학생 생질의 여권 신청 과정을 상세히 소개한 것은 병무청의 국외여행허가와 관련하여 과중하게 소요된 시간, 여러 사람의 노력, 본인의 아르바이트 손실과 비용 따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국민의 과중한 부담을 말하고자 함이다.

법이라는 것이 국민의 생활 편의와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국가 체제나 사회 기강의 유지를 위해서 법이 때로는 국민의 자유를 일정 부분 제약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또 그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 불가결함도 모르지 않는다.

군대 징집 연령기에 도달한 젊은이들이 여권 신청을 할 때 우선 병무청장의 국외여행허가를 얻어야 하는 이유를 병무청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젊은이들이 병역의무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국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법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나로부터 병무청 직원의 설명을 전해 들은 대학생 생질은 모욕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존심이 상한다고도 했다. 자신이 국민인 이상 국가로부터 어떤 공통 규제를 받는 것이야 감수할 수 있지만, 마치 의심과 감시를 받는 것만 같아서 기분이 더럽다고 했다.

국외 도피로 병역의무를 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극소수의 부유층 자제들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사안 때문에 전체 젊은이들이 피해를 입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대학생 생질의 입에서 나왔다.

나도 대학생 생질도 그런 법이 있는지조차 전혀 몰랐다. 이번에 여권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 우리는 그 법 규정을 충실히 지켰다. 그러면서 이런 게 바로 악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분단국가이고 병역의무가 가장 엄중한 나라라지만, 이런 법까지 꼭 필요한지는 의문이라는 생각을 거듭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대 징집 연령기에 도달한 젊은이들이 여권 신청을 할 때는 병무청장의 ‘국외여행허가서’를 먼저 얻어야 한다는 것, 그것의 신청 요건으로 호주와 보증인 2명의 인감증명원과 재산세 납부증명원을 제출하되, 호주나 보증인 1명, 또는 보증인 2명의 일년 재산세 납부 금액이 15만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 등이 어딘가 모르게 요식적인 냄새를 짙게 풍기는 성싶다. 어떤 실효성을 위해서보다는 법을 위한 법,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맛 때문에 생겨났고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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