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금성' 공작원 신분 공개한 안기부에 배상책임

대법원 "무책임한 폭로로 대북사업 무산...6억5천만원 배상하라"

등록 2004.08.19 15:24수정 2004.08.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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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특수공작원 시절에 신분을 위장하고 북한에 들어가 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인민 체육인' 계순희 선수를 만나 환담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박채서씨.
안기부 특수공작원 시절에 신분을 위장하고 북한에 들어가 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인민 체육인' 계순희 선수를 만나 환담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박채서씨.
정권 교체기인 지난 98년 2월 <한겨레신문>은 이른바 '이대성 파일'이라는 국가안전기획부의 '북풍공작' 문건을 폭로해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는 97년 대선 직전에 당시 북풍공작에 가담했던 안기부 수뇌부가 자신들의 범죄행위(정치 공작)를 은폐하기 팩트(사실)와 거짓을 적절하게 섞어서 각색한 이 문건에 근거해, "안기부는 당시 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 진영 모두를 북풍공작에 끌어들였으며 그 공작의 핵심에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안기부 대북공작원이 있다"고 폭로했다.

심지어 이 신문은 대북사업을 추진중인 광고기획사인 아자커뮤니케이션(이하 아자)의 전무로 위장취업한 박채서(흑금성)씨를 북한에 포섭된 '이중간첩'인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다.

국가정보기관 수뇌부의 기밀 유출과 언론의 무책임한 폭로가 어우러진 이 사건은 우선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가정보기관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이로 인해 엄청난 비용을 들여 10년 넘게 지속된 국가공작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첩보사에 유례없는 이 사건은 국가정보기관의 수뇌부가 기밀을 유출한 '자업자득'이었다.

이 사건은 또한 당시 흑금성이 안기부 특수공작원 신분인줄 모르고 그를 앞세워 대북사업을 추진하던 '아자'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당시 '아자'는 영화배우 안성기 등을 모델로 북한에서 '애니콜' 휴대폰 광고를 찍기 위해 북측과 5년간 독점계약을 마치고 광고 제작진의 방북을 앞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국 최초로 북한에서 광고를 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대북사업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던 박기영 아자 사장의 꿈은 언론의 문건 폭로로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6개월이 지난 오늘 대법원은 국가의 무책임한 비밀관리로 인한 민간업체의 피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피고는 6억5천만원 지급하라'는 원심 확정


대법원 1부(주심 이용우 대법관)는 이날 '아자'와 박기영 전 사장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에서 "직원이 안기부 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을 안기부가 공개함으로써 대북사업에 큰 타격을 받았다"며 "피고는 6억5천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은 안기부가 국내 민간업체를 이용해 대북 공작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안기부 간부의 무책임한 비밀문건 유출과 언론의 폭로로 민간업자에게 피해를 줬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어서 주목을 끈다.


재판부는 원심과 마찬가지로 판결문에서 "옛 안기부 공무원이었던 이대성씨 등이 소위 '이대성 파일'을 공개함으로써 '아자' 전무로 근무했던 흑금성(본명 박채서)이 안기부 대북공작원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며 이로써 원고 회사의 사회적 평가가 훼손돼 대북사업이 무산된 점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아자'측은 박채서 전무와 함께 97년부터 북한의 금강산, 백두산 등을 배경으로 남한 기업의 TV광고를 찍는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안기부 특수공작원인 박 전무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흑금성 공작원)을 밝히지 않은 채 북한측과 접촉하며 프로젝트 성사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었다.

그런데 이대성 전 안기부 대북공작실장이 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당시 당선자측 인사들에게 구명활동을 펼치고 은근히 협박하는 과정에서 각색한 기밀문건을 유출하고, 이를 언론이 폭로하는 과정에서 박 전무의 안기부 공작원 신분이 드러남에 따라 아자 측은 이로 인해 대북사업이 전면 중단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7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이에 따라 2000년 5월 1심 재판부는 "안기부의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원고패소 판결했으나 작년 6월 2심 재판부는 안기부의 책임을 인정해 "6억5천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박채서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만시지탄이고 아자측이 입은 손해액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지만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박채서씨도 이와 별도로 안기부 특수공작원인 자신을 '이중간첩'으로 묘사한 한겨레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 승소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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