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아들(?)'을 찾는 전화

세상을 보시는 팔순 노모의 눈

등록 2004.09.25 09:09수정 2004.09.2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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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에 해방공간의 극심했던 좌·우 이념대립과 6·25 전쟁을 몸으로 겪으신 내 어머니는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빨갱이'에 대한 기본적인 경계심과 혐오감을 갖고 살았다. 빨갱이는 어머니에게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빨갱이라는 용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런데 빨갱이에 대한 어머니의 경계심과 혐오감은 묘하게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어떤 공포감이 늘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북쪽과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의 누군가가 혹 빨갱이 사상을 갖게 되면 자칫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고 집안이 거덜나 버린다는 명백한 사실에서 오는 현실적인 공포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주변을 염려하는 데서 갖게 되는 공포감이었다. 북쪽에 대한 경계심과 함께 내 주변에 대한 염려로 말미암은 이중의 공포감을 더불어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6·25 전쟁 경험 세대들에게는 거의 공통적인 것이기도 할 터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쓸데없는 공포감을 안겨 드리지 않으며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자 하는 마음과 눈을 갖게 되면서 어머니와도 수시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72년 최전방 DMZ 생활을 끝으로 군에서 제대한 뒤부터 나는 부모님과 갈등을 빚었다.그 해 '시월 유신' 국민투표 때부터 시작하여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시절을 살면서 아버지와 의견 충돌을 빚을 때마다 어머니는 공포심을 갖는 듯했다.


중앙 무대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방에서 고작 가톨릭농민회 활동 정도를 하는 것인데도 어머니는 늘 불안한 기색을 하곤 했다. 아들이 절대로 빨갱이는 아니건만, 또 아들이 절대로 빨갱이는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이 굳게 믿으면서도 어머니는 혹 아들이 빨갱이로 몰리지는 않을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이었다. 내게 이런저런 하소연과 타박도 참 많이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런 태도는 우리나라의 민주화 진전과 보조를 맞추는 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사라져 갔다. 어머니에게서 불안감과 공포심이 사라지면서 우리 집에도 평화가 안정감을 갖게 되었다.


(2)

1990년대 중반은 충청도 지방에서 <자유민주연합>이라는 정치 집단에 의해 이른바 '황색바람'이라고도 불린 신지역감정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때 서산·태안 지역신문인 <새너울>의 논설주간 노릇을 하고 있었다. <새너울>과 <태안신문>에 자민련에 의한 충청도의 신지역감정 바람을 비판하는 글을 여러 번 썼다. 정치 집단에 의한 몰이성적인 지역감정 바람은 결코 충청도의 진정한 자존심이 아니라는 논조였다.

많은 전화들이 <새너울> 사무실로, 또 우리 집으로 걸려왔다. 말로만 듣던 전화폭력의 실상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그 전화폭력들에도 분연히 맞섰다. 때로는 똑같이 고성과 욕설로 대응하기도 했다.

어머니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다. 노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에서는 차마 못할 짓이었다. 전화기의 신호음만 울려도 덜컥 긴장하시는 노모의 걱정 때문에 나는 더욱 스트레스를 겪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긴장과 걱정은 예전의 그 불안이나 공포심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런 타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지지하고 성원해 주었다. 어머니는 촌 할머니답지 않게 지역감정의 어리석음과 폐해를 잘 헤아리고 있었다.

그게 10년도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 짧은 동안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충청도에 망국병이라 일컬어지는 지역감정을 일으키며 한때 맹위를 떨쳤던 자민련은 이제 충청도에서도 소멸의 길을 가고 있다.

(3)

1996년 이후로는 전화폭력은 겪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 집에 폭력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내가 2000년부터 인터넷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이버 공간에서 많은 욕설들과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무서운 말들이 많았다. 아무리 얼굴을 보지 않고 제멋대로 자판기를 두드려 만들어내는 말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욕설이 있는가 하면 내 거의 모든 글에 시비를 거는 전문 스토커도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23일 오랜만에 폭력전화가 한번 걸려왔다. 내가 최근에 웹사이트에 발표한 <너희가 '친북'의 의미를 아느냐?>라는 글과 관련하여 걸려온 전화였다. 하지만 내가 출타를 한 관계로 그 전화를 어머니가 받았다.

23일은 목요일로서 내가 합덕여고에 출강하는 날이었다. 오후 한 시간의 문예강좌 수업을 마치고, <충남예술>지 편집회의 관계로 천안으로 이동할 때였다. 어머니에게서 내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조금 전에 신원을 밝히지 않는 한 중년 남자로부터 이상한 전화가 왔노라고 했다. 거기가 아무개네 집이냐고 해서 그렇다고 하니까 아무개라는 사람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라고 했다. 아무개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전활 했느냐고 되묻고 나서 소설가라고 하니까 명색이 글을 쓴다는 사람이 그렇게 빨갱이 글을 쓰면 되느냐고 하더란다.

도대체 무슨 글이 빨갱이 글이냐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글이더냐고 어머니가 물으니, 지금 전화 받으시는 분은 그 아무개와 어떤 사이냐고 묻더란다. 그 아무개가 내 아들이라고 하니, 그 사람이 심히 뒤틀린 목소리로, "빨갱이 아들을 두어서 참 좋겄시다"하더란다. 그 말에 어머니가 벌컥 화를 내었단다.

"여보세오.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우리 집이 옛날부터 수십 년 동안 하느님을 믿고 사는 천주교 신자 집인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공산당이란 말이요. 그리고 지금 세상에 빨갱이라는 말이 뭔 말라비틀어진 소리요. 지금이 그런 것 따질 때요? 아무튼 우리 집은 천주교 신자 집이라 공산당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 그런 줄 아세요. 그리고 몇 살이나 먹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나같이 여든이 넘은 할매보다도 더 꽉 맥힌 사람이 어디다가 전화질이요, 전화질이!"

어머니는 열띤 목소리로 그 얘기를 내게 자세히 전해 주었다. 조금은 의기양양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고 애를 썼다. 운전에도 신경을 썼다. 잠시 후에 나는 정색을 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잘하셨어요. 고마워요."
"고맙다니? 그게 뭔 소리라나?"
"옛날의 어머니가 아니니까요."
"난 또…. 지금이 어떤 세상이여?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면 되겄남.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해야 하고, 변할 건 변해야지."
"예. 그렇구 말구요."
"하여간 조심해서 천천히 잘 다녀오너."
"예. 걱정 마세요."

창 밖을 보니 마침 공세리 성당 옆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성호를 그었다. 입 밖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를 했다.

하늘이 더욱 푸르러 보였다. 들판은 황금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가을은 계속적으로 9월 하순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차의 유리창을 좀 더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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