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 이중국적자', 우리는 누구인가?

[서평] 조현범의 <문명과 야만>

등록 2004.10.04 15:41수정 2004.10.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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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명과 야만>

<문명과 야만> ⓒ 책세상

오늘날 한국 사회, 혹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복잡한 층차의 정신적 혼란에 처해 있다. 우리 안에는 분명 이질적인 모순이 존재하며, 그 딜레마는 궁극적으로 전통과 현대의 단절, 동양과 서양의 괴리로부터 기인한다. 심지어 딜레마는 이제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된 것 같다. 다시 말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한 사람의 동양인인 동시에 서양인으로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인들이라면 그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하지 않겠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정신적인 이중 국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더욱이 우리 안에 혼재된 근대적 요소와 전근대적 요소의 불화는 우리의 가치관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과연 우리 내면에서 어디까지가 한국인이며 어디까지가 서양인인 것일까?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 속에서 살아 온 동양과 서양의 만남, 그 이질적인 문명이 부대끼면서 벌어졌던 마찰음, 그 와중에 펼쳐졌던 역사의 희비극…… 근세의 한국사를 돌아볼 때마다 항상 나는 우스꽝스러움과 비애감의 이중주를 듣는다. 그 씁쓸했던 패배의 추억. 그러나 여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는 식민적인 인식틀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두 눈 부릅뜨고 우리와 저들의 역사를 직시해야 한다.

사회진화론과 인종주의가 자명한 신의 섭리로 여겨지던 19세기의 세계, 서구 문명은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이라는 진화론의 논리를 내세워 제국주의의 침탈을 정당화했다. 신이 자신의 역사(役事)를 증명하기 위해 서양인을 택했다는 선민의식은 구미 사회의 상식이었으며, 따라서 전세계를 서구화하는 것이 곧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는 아무런 도덕적인 하자가 없었다.

당시 서양인들이 생각하기에 세계란 '서구 문명'이 아닌 한 '비서구 야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그저 미개하고 야만적인 원시인들의 땅이었고, 조선인은 신의 복음과 문명의 복택으로 거듭나야 할 피동적 존재에 불과했다. 어리석고 미개한 원시인들아. 우리가 식민 지배를 통해 너희에게 빛을 주리라. 그러니 고마운 줄이나 알아라.

계몽주의의 폭력은 어떤 방식으로 기능하고 작동하는가. 다양성과 이질성에 대한 배타주의, 문명화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문화의 가치 서열화, 바로 '야만'이라는 언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문명의 야만성.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폭력적 계몽주의가 이제는 우리 안에도 자연스럽게 내면화되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타자로 인식하면서 우리 자신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몰주체적인 이념에 함몰되어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역사의 필연법칙이자 자연의 섭리라고 여겼던 19세기의 시대 정신은, 오늘날 보다 은밀하고 간교한 방식으로 21세기에 재연되고 있다. 세계화와 보편주의라는 보다 세련된 외투로 포장된 획일적인 문명 논리는 과연 100년 전의 그것에 비해 얼마나 더 나아갔는가. 여전히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의 우스꽝스러운 비애는, 우리 안에 내재화된 타자의 시선이 얼마나 강고한 것인지 실감하게 한다.


이 책 <문명과 야만>(책세상)은 서구의 시선에 의해 우리 자신이 타자화되어 갔던 역사의 한 단면을 기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동양학 연구자들의 오랜 고뇌와 번민을 재확인시키며, 일반 독자들에게 그 고민의 일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이 우울한 계보학적 탐색을, 고통스럽지만 외면할 수 없다.

문명과 야만 - 타자의 시선으로 본 19세기 조선

조현범 지음,
책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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