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렁이는 법조계, 침묵하는 언론

[取중眞담] 담배소송 관련 '요지서' 논란 20여일째

등록 2004.11.24 11:40수정 2004.11.2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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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6일 대부분의 언론들은 "흡연-폐암, 구체적 인과관계 확인불능"이라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담배소송' 사건을 심리중인 재판부가 배포한 서울대 의대 교수 5인의 '감정서' 요약본에 기초해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원고측 변호인단과 "감정서 원문의 내용을 재판부가 잘못 요약해 요지서를 작성했다"고 지적하면서 재판부 기피신청과 법관 징계요청서를 제출했다. 재판부 역시 이 요지서에 대해 '부적절하고 편파적이었다'는 지적을 일부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대한변호사협회는 원고측 변호인단의 '법관징계요청'과 관련해 최근 대법원에 공정한 처리를 강력히 요청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측도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처리 여부에 따라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히는 등 법조계가 술렁이고 있다.

"오보를 인정하지 않는 언론들"

그렇다면 언론은 재판부로부터 보도에 예단을 줄 수 있는 왜곡된 '요지서'를 통해 쓰여진 '기사'를 정정하거나 반론 차원에서 후속보도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상당수 언론들은 이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이에 대해 원고측 변호인단은 "이는 자신들의 기사가 오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보가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번 논란은 '담배소송' 사건을 심리중인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재판장 조관행 부장판사)가 지난 5일 본 사건과 관련된 서울대 의대 교수 5인이 작성한 A4 용지 62쪽 분량의 '감정서' 원문을 언론에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재판부는 감정서 원문과 함께 그 내용을 직접 요약해 4쪽 분량도 안되는 '요지서'를 법원출입기자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일부 언론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은 다음날 <흡연-폐암, 구체적 인과관계 확인불능>, <"흡연→폐암, 확인 안된다">, <서울대 의대 교수들 "흡연-폐암 인과관계 확인 어려워">, <흡연 "소송환자의 인과관계는 확인 불능" 폐암> <'흡연-폐암 관련성 과학적 입증 불가능'> 등의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이와 같은 보도 내용에 발끈한 원고측 변호인단과 국립암센터 등 관계자들은 그 다음주인 11일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흡연은 폐암 원인의 80~90%"이라며 "감정서 원문의 내용을 재판부가 잘못 요약해 요지서를 작성했다"면서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서와 법관 징계요청서를 제출했다.

"오보를 바로잡는 것이 언론 아닌가"

당시 원고측 변호인단측이 '요지서'의 왜곡 등을 지적하는 기자회견에서 몇몇 기자들은 "재판부가 작성한 요지서가 잘못된 것은 재판부에 말하고 그만 넘어가시죠", "기자들이 진실을 왜곡했다고 하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저희도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죠", "판사가 요약한 것을 언론에 문제 제기하는 것이…" 등의 말로 원고측 관계자의 말을 끊기도 했다.

이에 김일순(전 역학회 회장)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는 "모든 언론 보도를 분석했는데 거의 대부분 판사가 제공한 요지서의 내용이 제목과 주된 논지로 이뤄졌다"며 "그렇게 심한 오보를 한 것을 알았다면 바로잡는 것이 언론 아닌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은 기자회견 중에 발표한 '요지서'의 왜곡 부분에 대한 주장과 그로 인해 국민들에게 흡연과 폐암간의 인과관계가 잘못 알려졌다고 지적한 내용은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언론들은 단지 원고측 변호인단이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서' 제출을 주된 내용으로 보도하는 선에서 그쳤다.

실수 인정치 않아 국민 알권리조차 막는 언론들

그 동안 재판부는 출입기자들의 편의를 위해 분량이 많은 판결문을 요약한 '요지문(서)'을 법원출입기자들에게 제공해 왔으며, 반대로 기자들이 '요지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기자들은 일단 이 요지서를 토대로 우선 기사를 작성한 후 원문을 검토해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바로 잡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번 '요지서'는 이례적으로 작성된 것이고, 작성 경위도 불분명한 상태로 언론에 배포됐다. 결국 그 요지서가 '화(禍)'를 불러일으켜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과 해당 재판부의 재판장인 조관행 부장판사에 대한 '법관 징계신청'까지 확대됐다.

이번 '요지서' 논란에서 언론의 첫번째 잘못은 요지서만을 보고 기사를 작성한 실수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은폐해 국민의 알권리조차 가로막고 있는 태도이다.

국내 대다수 언론의 '이상한 침묵'으로 인해 지금도 상당수 국민들은 서울대 의대 교수의 감정서에는 '흡연-폐암, 구체적 인과관계 확인불능'이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믿고 있을 지도 모른다.

조관행 판사 "언론에 요지서 준 것 후회스럽고 섭섭"

다음은 '요지서'를 배포한 민사합의12부의 재판장인 조관행 부장판사가 지난 9일 오후 5시30분경부터 30여분간 <오마이뉴스>와 <내일신문>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밝힌 내용이다.

"요지서를 준 것은 (감정서의 원문이) 양도 많고 길고 해서 (기자들이) 알 수 없어서였다. (언론에서) 객관적으로 가치 평가를 넣지 말아야 했는데, 제목을 어느 쪽으로 몰아야 하니까 어느 한쪽으로 썼다. 나로서는 언론에 (감정서)요지까지 준 것이 후회스럽고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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