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는 모든 것을 말해준다

퍼트리샤 콘웰 시리즈 재출간

등록 2004.11.30 16:14수정 2004.12.0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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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에게 관심을 갖고 그 작가의 모든 작품들을 읽겠다고 마음먹을 경우에, 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가능하다면 그 작가의 작품들을 발표 순서대로 읽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택할 경우에 해당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변해가는 (또는 고정되어가는) 작품 세계와 캐릭터의 모습을 파악하는 재미를 동시에 얻을 수가 있다.

이런 규칙은 추리소설에도 적용될 수 있다. 특히 한 작가의 작품들이 같은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연작의 성격을 가질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연작의 성격을 갖는 대표적인 추리물로서는 우선 로렌스 샌더스의 '맥널리 시리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 샌더스의 후반기 대표작들인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미국 플로리다의 팜비치 해변을 무대로 그곳에 모여 사는 인간들의 어두운 욕망과 허영을 추리 형식을 빌어서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맥널리 시리즈는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로렌스 샌더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손자에 의해서 계속 시리즈가 발표될 정도였다.

그리고 또 다른 연작추리물로 케이 스카페타 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퍼트리샤 콘웰의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재출간된 퍼트리샤 콘웰의 처녀작 <법의관(Postmortem)> 표지
재출간된 퍼트리샤 콘웰의 처녀작 <법의관(Postmortem)> 표지노블하우스
스카페타 박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처녀작 <법의관(Postmortem)>은 출간되자마자 각종 추리문학상을 휩쓸면서 퍼트리샤 콘웰의 이름을 베스트셀러 작가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또한 이후에 발표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그녀의 작품은 1억 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집계된다고 한다.

스카페타 박사는 이혼한 40세의 여검시관이다. 그녀는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져서 자살한 시체부터 목이 졸려서 교살 당한 시체까지 1년에 수백 구의 시신을 검시하는 버지니아주의 수석 법의관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일에 철저한 프로이자 성공한 캐리어 우먼으로 등장하는 스카페타 박사인 만큼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서는 냉철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하나뿐인 조카 루시에게는 연민과 애정을 보이며 사랑을 느끼는 남자 앞에서는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여자들을 살해하는 정체 모를 연쇄살인범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기도 한다.


이렇게 냉정하면서도 감성적인 면을 가진 그녀는 검시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단서들 (체액, 체취, 작은 천 조각, 몸에 묻은 화공약품 등)을 바탕으로 범인의 주거환경과 직업 등을 끈질기게 추적하며 사건 해결에 필요한 온갖 단서들을 제공하고 필요하다면 그녀가 직접 범인을 검거하기 위한 현장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모르지만 '스카페타 시리즈'에서 범인을 검거하는 순간의 모습은 고전추리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형태이다. 고전 추리물에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추론과 증거와 정황 등을 통해서 범인을 독자들의 눈앞에서 밝혀내는 형태였다.


하지만 '스카페타 시리즈'에서는 검시를 통해 사소한 단서들을 확보한 후에 범인의 대상을 좁혀가다가 범인이 또 다른 범행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한 방의 총성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형태가 많다.

따라서 아쉽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건의 많은 부분들은 끝까지 독자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범행의 형태 또한 대부분 특별한 동기가 없는 이상심리의 연쇄살인의 모습을 띈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는 추리물로의 재미를 제공하는 요소들이 많다. 우선은 흔히 과학수사라고 불리는 현대식의 수사방식을 소설 속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DNA 분석, 체액분석, 현장의 지문 및 범인이 남긴 사소한 흔적들을 철저하게 분석한 후에 방대한 추론과 심리분석을 통해서 범인의 대상을 서서히 좁혀나간다.

또한 퍼트리샤 콘웰은 시리즈가 발전해가면서 다양한 추리소설의 기법들을 사용한다.

처녀작인 <법의관>이 고전추리소설의 틀을 많이 활용한 작품인 반면에 <배반의 얼굴(The Body Farm)>은 독특한 반전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또한 <포터의 벌판에서(From Potter's Field)>에서는 살인범의 정체를 초반에 파악하고 그 뒤를 쫓는 형식을 보이고 <악의 경전(Cause of Death)>에서는 개인적인 범죄를 넘어서서 조직과의 대결을 선보이고 있다.

'스카페타 시리즈'의 또 다른 재미는 시리즈가 계속돼가면서 그녀와 주변 인물들 간의 변화되는 관계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유능한 범죄수사관이지만 보수적이고 고집불통인 피트 마리노 형사부장, 부드럽고 호의적인 FBI 심리분석관 벤턴 웨슬리, 그리고 이모를 사랑하지만 웬지 삐딱해 보이는 조카 루시.

교묘한 조화와 긴장을 유지하며 사건해결을 위해 협력하는 이들의 관계는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흥미롭게 변화 발전해나간다. 첫 작품에서 10살의 어린 소녀로 등장하는 조카 루시는 시리즈가 진행되면 어느새 20살을 훌쩍 넘어서서 스카페타 박사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협력자가 된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퍼트리샤 콘웰의 모습은 루시에게 많이 투영된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진 '스카페타 시리즈'는 추리물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작품들이다. 고전추리소설에 식상한 독자에게도, 많은 형태로 분화된 현대의 테크노 스릴러나 법정소설 등에 낯선 독자들에게도, 고전과 현대가 적절히 어울린 퍼트리샤 콘웰의 작품들은 꽤 괜찮은 만족을 줄 수 있는 선택일 듯하다.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가 출판사 노블하우스에서 재출간된다.

그녀의 처녀작 <법의관(Postmortem)>을 시작으로 그녀의 최근작까지 모든 작품들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전에 다른 출판사에서 띄엄띄엄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온전한 형태의 전작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과 퍼트리샤 콘웰의 작품들의 애호가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이 스카페타 박사의 팬으로서 반가운 일이다. 그녀의 모든 작품들을 순서대로 읽을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

법의관 - 전2권 세트 - 법의관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노블하우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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