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과 '모내기' 그림, 무엇이 다른가

[주장] 국보법이 존속하는 한 '검찰의 딜레마'는 계속된다

등록 2005.03.31 17:48수정 2005.04.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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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학철 화백의 작품 '모내기'(캔버스에 유채, 162.2×112.1cm. 1987). 이 그림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신씨는 1·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지난 99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징역 10월형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 등의 판결이 내려졌다. 현재 이 그림은 검찰의 압수물보관창고에 보관돼 있다.

신학철 화백의 작품 '모내기'(캔버스에 유채, 162.2×112.1cm. 1987). 이 그림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신씨는 1·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은 지난 99년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지법으로 돌려보냈다. 결국 징역 10월형 선고유예와 그림 몰수 등의 판결이 내려졌다. 현재 이 그림은 검찰의 압수물보관창고에 보관돼 있다.

작년 국가보안법이 뜨거운 집중타를 맞은 탓인지, 올해 들어 그 결과들이 하나둘씩 가시화되고 있다. 올 3월 국가보안법 관련사건, 특히 지난 10여 년간 학문·사상의 자유를 옥죄던 대표적 사건들에 대해 연이어 무죄판결과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다.

3월 11일 대법원은 경상대 교재인 <한국사회의 이해>에 대해 무죄판결을 하였고, 3월 31일에는 검찰이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과 최장집의 저서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 대해 잇달아 이적성이 없다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 반갑고도 반가운 소식이다.

이렇듯 법원과 검찰의 조치를 반기면서도 한편으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한국사회의 이해>와 <태백산맥>은 11년간이나,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은 7년간이나 재판과 수사를 받아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저자들은 참으로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래씨와 출판사는 1990년 <태백산맥>을 출간한 이후 수많은 협박전화와 위협에 시달렸다고 한다. 검찰은 1994년 이 책에 대해 국가보안법 제7조의 이적표현물 제작·반포죄를 적용하여 수사에 착수했고, <태백산맥> 관련 프로를 제작한 방송피디는 회사로부터 징계성 전출을 당하는 등 그 파문은 갈수록 커져갔다.

조정래씨는 11년 동안 수사 그 자체보다는 처벌 대상이 된 이후 마음대로 집필활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경찰의 수사를 받는 동안에는 <아리랑>을 집필했고, 검찰수사과정에서는 <한강>을 쓰고 있었는데, '이적성' 논란이 야기될 가능성이 있는 대목에서는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더란다.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에 재갈을 물린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 무죄와 무혐의 판단만으로는 그 긴 세월 동안의 고통스런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법원과 검찰은 지금까지 '이적성'이라는 모호하고 낡은 잣대로 인권을 함부로 짓밟았던 모든 사건에 대해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해야 하고, 또한 궁극적으로는 이런 과오를 낳게 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요청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번 법원과 검찰의 조치는 신학철씨의 '모내기'그림에 대한 대법원의 유죄판결, 검찰의 그림반환 거부조치와 비교된다. 대법원과 검찰이 들이대는 '이적성' 기준에 따르더라도,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직접적인 표현보다 '모내기' 그림의 이적성 정도는 훨씬 '약'하다.


그럼에도 '모내기'는 여전히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혀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작가의 손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검찰은 이것이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유엔인권위원회가 그림반환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근거가 없다'는 납득할 수 없는 답변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검찰의 이번 '이적성 없음' 조치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검찰의 이번 조치는 국가보안법 적용에 있어 전향적 판단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실적 부담을 덜기 위해 마지못한 조치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태백산맥>의 경우, 수사기관의 도마 위에서 '이적성'이라는 칼로 난도질을 당하고 있던 시절에 역설적이게도 경찰대를 포함한 전국의 각 대학은 이 책을 권장도서로 지정했고 평론가들은 우리시대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무려 지금까지 600만부가 팔려 나갔다.


검찰이 11년 동안 위법성 판단을 보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태백산맥>에 '이적성'이라는 낙인을 찍는 순간 최소한 600만 명을 '이적표현물 소지죄'로 처벌해야 하고, 권장도서로 추천한 대학의 관계자들, 평론가들 역시 처벌해야 하는 사법사상 최고의 코미디를 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검찰로서는 엄청난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내기'는 그런 부담이 없다. 온 국민이 언론을 통해 '모내기'를 보긴 했으나 그들은 이적표현물을 '소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의적 요소가 다분한 '이적성'이라는 잣대로 부담이 큰 사건은 무혐의 처분을 하고, 별 부담이 안 되는 사건은 예외 없이 처벌하는 이중플레이. 냉전적 구시대에나 유효했던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존속하는 한 이 같은 검찰의 딜레마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a 지난해 5월 국보법 항의전시회 '금지된 상상력'에서 신학철 화백이 '모내기' 그림의 프린트 물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가위표를 그린 작품 '국가보안법 2' 앞에 서있다.

지난해 5월 국보법 항의전시회 '금지된 상상력'에서 신학철 화백이 '모내기' 그림의 프린트 물에 붉은색 스프레이로 가위표를 그린 작품 '국가보안법 2' 앞에 서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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