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 이놈 게 섰거라!

등록 2005.04.10 06:51수정 2005.04.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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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에서 올라오는 기사마다 꽃향기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사월도 어느새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그럴 때도 되었지요.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조바심이 납니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아직도 활짝 핀 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탓에 꽃향기 머금은 기사를 쓰고 싶어도 아직은 때가 이릅니다.


그래도 운이 좋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숨어 피는 들꽃이라도 찍어 볼까 가까운 야산을 찾았습니다. 산수유 노란 꽃을 보고 찔레 덩굴에 돋는 연한 새순을 보며 강원도 원주에도 봄이 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개나리 노란 꽃잎도 막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기원
산비탈 아래 산수유가 활짝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가까이 가서 사진 몇 장 찍어 볼까 생각하며 내려가려는데 눈앞에서 뭔가 움직이는 게 보였습니다. 청설모란 녀석이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나들이를 나왔는지 나뭇가지 사이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습니다.

어릴 때 다니던 학교 길은 참 멀었습니다. 고개까지 넘어야 했습니다. 책보를 비스듬히 메고 고갯길을 오르다보면 다람쥐가 참 많았습니다. 조그만 녀석이 나뭇가지 사이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이라도 느끼면 후다닥 나뭇가지를 타고 사라집니다.

아이들은 다람쥐를 보면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아이들의 어설픈 돌팔매질에 쉽게 잡힐 다람쥐가 아니었지요. 다람쥐는 아이들의 손에서 돌이 떠나기도 전에 나뭇가지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다람쥐만 보면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형이 던진 돌에 비탈길을 타고 오르던 다람쥐가 맞았습니다. 정통으로 맞은 것도 아닌데 다람쥐는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다가가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팔매 돌을 던진 형이 으쓱대며 다람쥐를 손으로 집어 들었습니다. 부러움과 호기심에 가득 찬 눈망울로 아이들은 형의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람쥐를 집어들던 형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다람쥐가 필사적으로 형의 손을 할퀴고 물어뜯기 시작했습니다. 애써 잡은 다람쥐를 놓치지 않으려는 형과 손아귀를 벗어나 도망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는 다람쥐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형은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손가락 사이에 붉은 피가 흐른다 싶더니 결국 다람쥐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형의 손아귀를 벗어난 다람쥐는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형은 다람쥐가 할퀴고 물어뜯은 상처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참을 쩔쩔 매며 서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람쥐보다 청설모가 더 많이 눈에 띕니다. 다람쥐에 비해 덩치도 크고 검은 데다가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녀석입니다. 밉상이어도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오늘따라 녀석에게 눈길이 끌렸습니다.

이기원
녀석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히 앉아 움직이지 않던 녀석이 카메라를 의식하고는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뭇가지를 타고 도망가는 청설모를 찍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렵사리 녀석을 포착해서 셔터를 눌러도 찍힌 사진을 보면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기원
나뭇가지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녀석과 한참을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지만 제대로 찍힌 사진은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 사진에서 도망가는 청설모 몸통만 겨우 찍힐 정도였습니다.

녀석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보며 생각하니 청설모 녀석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심코 던진 팔매 돌이 다람쥐의 생명을 위협했던 것처럼 청설모 녀석에겐 카메라가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흉측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를 일입니다.

다음에 녀석을 만날 일이 있으면 팔매 돌도 던지지 않고 카메라도 들이대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다 내려오리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 http://www.giweon.com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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