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원
발굴되기 전에도 이 절터를 찾은 적은 많습니다. 그때는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당간지주가 있던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논과 밭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모든 곳이 발굴터로 변해 있습니다. 아직 곡식이 자라고 있는 논과 밭도 있지만 그곳 역시 발굴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분의 말에 의하면 이 절터를 제대로 발굴하기 위해서는 10년도 넘게 걸린다고 하니 그 엄청난 규모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권력은 종교적 권위를 빌어 자신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조 역시 예외가 아니었지요.
왕건이 주도하는 통일 과정에서 남한강 지역은 결코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치악산을 근거로 했던 호족 양길이 궁예에게 패했고, 궁예마저 송악 호족이었던 왕건에게 밀려나고 말았으니 통일 고려 왕조에서 원주를 비롯한 남한강 일대의 사람들이 새 왕조에게 갖는 호감이 높지 않았던 것이지요.
고려 왕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호의적이지 못한 남한강 일대의 민심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으로 불교의 힘을 이용했던 것입니다. 당대 법상종 최고 권위자였던 지광국사가 남한강 유역의 법천사에서 활동하다 입적한 사실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