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판화사의 케테 콜비츠, 김봉준의 삶

김봉준 화백의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를 읽고서

등록 2005.06.10 17:21수정 2005.06.1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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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 때 타워 건물 옥상에서 ‘독재 정권 타도’라는 유인물을 뿌렸고, 탈춤 추는 것조차 흑백논리로 재단하던 그 때에 온통 풍물과 탈춤에 미쳐 있었고, 동일방직 해고 여공들과 함께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는 연극을 하고, 곧이어 시위 주동자로 지목돼 동대문경찰서로 끌려가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았다던 김봉준.

그 뒤, 전업화가가 되려는 꿈을 접고 뜻하지 않게 '창작과비평사'에 들어간다. 이른바 부모님이 원하는 직장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입사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그는 스스로 따뜻한 온실을 박차고 나간다. 1980년 5월에 일어났던 광주 민주화 운동을 서울 한복판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인물 초안을 직접 맡아서 썼고, 당시 탈춤반 회원들과 마음을 합하여 서울 곳곳에 그 유인물을 뿌렸다. 그 일로 그는 1년 넘게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


수배자로 도망쳐 다니던 그 삶은 계엄해제와 함께 끝이 난다. 구속과 억압에서 자유로운 몸이 된 것이다. 물론 그 기간 동안 자신과 함께 몸담았던 많은 동료들, 방직공장 누나들, 탈춤반 회원들, 그 밖에 그를 도와주고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 자유와 함께 찾아 온 몸으로, 그는 그때부터 목판화를 깎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른바 화가로서 걷는 첫발인 셈인데, 그 몸부림 쳤던 지난날을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동아일보사. 2001)에 담아냈다.

목판화〈아리랑 고개〉. 이 작품은 유인열 님이 연출한 마당극 〈판놀이 아리랑고개〉의 상징 그림으로 쓰였다.
목판화〈아리랑 고개〉. 이 작품은 유인열 님이 연출한 마당극 〈판놀이 아리랑고개〉의 상징 그림으로 쓰였다.동아일보사
오른쪽 작품인〈아리랑 고개〉라는 이 판화는 수배에서 풀려 난 뒤에 작업한 결과물이다. 그 때 그는 이 판화뿐만 아니라 〈어머니 돌아왔어요〉라든지 〈지게꾼〉,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 〈목칼을 찬 조상〉등도 깎아 냈고,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 몸짓을 온 몸으로 나타내보려는 뜻으로 〈사면초가〉나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작품들도 다듬어 냈다.

그런데 그 당시 그가 깎아 냈던 목판화들은 남달랐다. 먼저 붓으로 한지 속에 밑그림을 그려 넣었고, 그 다음에 판화에 옮겨 떠내듯 파낸 것이었다. 이른바 붓 맛과 칼 맛을 동시에 살렸는데, 그래서 그 느낌과 멋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만큼 남다른 힘도 느낄 수 있고, 또 따뜻함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목판화 〈통일해원도〉. 1990년 뉴옥에서 있던 남북한영화제 포스터에 쓰였고, 1986년 남북통일대동제 포스터로도 이용됐다.
목판화 〈통일해원도〉. 1990년 뉴옥에서 있던 남북한영화제 포스터에 쓰였고, 1986년 남북통일대동제 포스터로도 이용됐다.동아일보사
왼쪽 작품인 이 판화는 〈통일해원도〉로서, 1983년부터 농민들과 연줄이 닿아 깎아 낸 작품이다. 이 때 그는 〈고향 땅 부모 형제〉, 〈두렁〉, 〈공사판〉, 〈사월의 노래〉등을 목판화에 담아낸다.


그가 이러한 작품들을 담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농민회에서 일하고 있던 허병섭 목사라든지, 전국농민회 회장인 정광훈씨도 만난 덕택이기도 한데, 이때 그는 그 분들 도움으로 농촌과 농민들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들이 겪는 삶이 무엇인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서 그와 같은 판화들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민중 만화 가운데서 맨 처음 것이라 할 수 있는 ‘농민만화’도 그 무렵에 찍어냈고, 그 밖에 농민 두레풍물 강습이라든지, 농민문화 강연회라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섰다.


그 뒤, 김봉준은 해외에 나가 워싱턴 DC에서 서경석 목사와 함께 “미국은 군부독재를 지원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풍물패를 이끌기도 했고, 부천에 사는 노동자들에게 단체 티셔츠에 찍을 도안도 직접 그려주었는데, 그때 나온 작품들이 〈파업〉, 〈연대〉, 〈장고나비춤〉, 〈거지광대춤〉, 〈목중춤〉등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정말로 멋진 판화가 김봉준 님. 이름도 온 몸으로 농민전쟁을 이끌었던 전봉준과 비슷하여, 과연 그는 어찌할 수 없는 민주화 운동에 온 몸을 던져야만 했던 운명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온 몸으로 가난한 민중과 나약한 노동자와 시골 농민들과 함께 그 역사적 삶을 살아내야만 했을까.

그렇다면 그가 그려낸 목판화는 그저 판화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숨 가쁜 우리 역사와 함께 그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서양 판화와 그 역사 마당에 ‘케테 콜비츠’가 있다면, 동양 판화와 그 역사에는 분명 김봉준이 있지 않겠나 싶다.

지금 그는 8년째 강원도 두메산골 ‘진밭 마을’에서 새 삶을 꾸리고 있다. 그곳에 사는 까닭은 자본집약적인 발전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산골 마을에서 희망이 되는 그 대안을 꿈꾸기 위해서란다. 이른바 생태 공동체 삶을 미래에도 마음껏 펼쳐보고자 위함인 듯싶다. 그래서 해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볼거리와 먹을거리, 그리고 문화장터 같은 시골문화축제를 연다고 한다.

“지금까지 근대화 도시 바람에 밀려 후미진 산골이 된 것이 어찌 보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다 사라져 간 미풍양속이 여기는 남아 있어 인심과 신명이 흐르고 소탈하고 유장한 품성을 잃지 않았다. 미래의 복이다. 21세기 인류가 환경 위기를 넘는 대안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태적 공동체를 열렬히 갈망한다면 두메산골은 분명 ‘준비된 미래의 마을’일 수 있으니 말이다.”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 김봉준 화백의 목판화 이야기

김봉준 지음,
동아일보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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