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맨 처음 그린 사람은 누구?

이구열의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를 읽고

등록 2005.06.23 15:17수정 2005.06.2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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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를 맨 처음으로 그린 사람은 누군가?

우리 나라에는 언제쯤 만화가 생겨났을까. 누가 맨 처음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연필이나 볼펜으로 무작정 끄적거리며 그렸던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에 처음으로 만화를 그렸던 사람은 따로 있다. 이른바 만화 하나로 언론에 정식으로 알려진 사람이 따로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도영이다.


이도영이 그린 ‘이완용의 자부상피’. 미련한 놈이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자루가 빠져서 제 등에 떨어져서 상한다는 뜻, 친일 매국에 앞장 선 이완용을 망신시키려는 은유적 표현.
이도영이 그린 ‘이완용의 자부상피’. 미련한 놈이 도끼로 나무를 찍다가 도끼자루가 빠져서 제 등에 떨어져서 상한다는 뜻, 친일 매국에 앞장 선 이완용을 망신시키려는 은유적 표현.돌베개
그런데 사실 이도영은 만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태어난 곳도 한양일 뿐만 아니라 집안도 대대로 빛나는 좌의정과 대제학을 거친 집안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집안 어른들은 벼슬을 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내다본 그는 18살 나이에 정부 전환국에 들어가 근대 화폐 제작을 습득하게 되고, 그때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통 화법을 전수받게 된다. 그 후 1905년에는 출판사 편집사원을 거쳐, 휘문고등학교 도화 교사로 지내다가 <대한민보> 창간에 힘을 보태면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사만화를 그리게 된다.

이도영이 시사 만화가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오세창 덕택이었다. 당시 개화당 사건으로 신변 위협을 받고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오세창은 손병희를 만나게 되고, 그 후 민족자강운동을 벌이던 가운데 <대한민보>를 창간하게 된다. 그때 오세창 사장은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전통 화법을 사사한 이도영에게 민족심을 일깨울 만화를 부탁했던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도영은 처음으로 만화에 손을 댔던 것이다.

2. 이구열이 쓴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이구열이 쓴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돌베개, 2005)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관심 갖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림 자체때문이 아니다. 어떤 그림이 남달리 멋지다거나 또 색채가 독특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림들을 평할 수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그 그림과 관련된 인물과 역사적 사실들을 설명해 준, 이구열씨만이 갖고 있는 혜안과 그 입담 때문에 솔깃했다. 그만큼 이 책에는 미술 작품을 둘러싼 우리 나라와 일제 그리고 미국과 얽힌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 하나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끌렸던 것이다.


이구열씨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그건 우리 나라 근대미술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을 때인 1960년대부터, 그는 미술 분야 쪽에 관심을 갖고서 기자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 분야 전문기자 1호로 꼽히고 있으며, 미술평론에 있어서도 큰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근대 한국미술사에 있어서 초기 유화 작품은?


그럼 근대 한국미술사에서 유화 작품을 처음으로 그린 사람은 누구일까? 유화 기법이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아무래도 외국에 나갔다 온 유학생인 것만은 분명할 것 같다. 그만큼 그림에도 남다른 열정이 있고 또 집안 배경도 튼튼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고희동의 <자매>. 원화는 없고 흑백도판만 남아 있음.
고희동의 <자매>. 원화는 없고 흑백도판만 남아 있음.돌베개
그가 과연 누구일까. 이구열씨는 그를 고희동으로 꼽고 있다. 고희동은 앞서 말한 대로 매우 지체 있는 중인층 가정에서 유복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다. 아버지도 군수였고, 맏형도 개성 관찰사였고, 둘째 형도 주일 전권공사를 역임한 쟁쟁한 가문을 이어 받았다.

그런 배경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덕에 그는 24살에 국비 유학생이 되어서,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유화를 배웠고, 29살에 졸업하면서 <자매>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작품을 두고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조선에서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고희동은 1915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5년 과정을 졸업하고 돌아와 유화 활동을 함으로써, 한국에 서양식 유화를 신미술로 정착시킨 선구자였다. 그는 곧 새로운 양화 기법의 시대적 개척자였다.”(159쪽)

4. 그 밖에 여러 가지 이야기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한국 최초로 양화 부부가 탄생한 것도 밝혀주고 있는데, 바로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한 서울에서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직접 지켜봤던 구본웅이, 나라를 되찾은 훗날 그 옛날 그 처참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펜 하나로 그려낸 펜화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리고 1916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유학생이던 김관호가 졸업식 때 제출한 '해질녘'이 한국 최초의 나체화라는 이야기, 1893년 5월부터 10월까지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 때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음악 문화를 알릴 10명의 악사와 함께 83개의 물품을 가지고 갔고, 그리고 “조선식 가옥을 세우고 기와도 입힌 모양”으로 된 ‘조선관’도 세웠다는, 그야말로 우리 나라 근대 미술사와 관련된 그 모든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밝혀주고 있다.

모름지기 예술가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 역사 속에 길이 남게 된다. 작품이 없다면 분명 그 예술가도 그리고 그 예술가와 작품을 둘러싼 역사도 없을 것이다. 문학작품이야 조금은 꾸밀 수 있다지만 그림 작품은 꾸며낼 수도 없는 일이니, 그 역사성은 더욱 진지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숨어 있는 작품과 그 예술가를 찾아, 그 역사성과 함께 모든 사실들을 밝혀가며 이야기를 엮어 낸 이구열씨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 근대 미술사에서 시사만화라든지, 펜화라든지, 유화라든지, 나체화라든지 그 모든 작품들의 시작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참으로 대단한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 한국 근대미술사학의 개척자 이구열의 화단 비화

이구열 지음,
돌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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