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동의 <자매>. 원화는 없고 흑백도판만 남아 있음.돌베개
그가 과연 누구일까. 이구열씨는 그를 고희동으로 꼽고 있다. 고희동은 앞서 말한 대로 매우 지체 있는 중인층 가정에서 유복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다. 아버지도 군수였고, 맏형도 개성 관찰사였고, 둘째 형도 주일 전권공사를 역임한 쟁쟁한 가문을 이어 받았다.
그런 배경도 있고 또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덕에 그는 24살에 국비 유학생이 되어서, 일본에 건너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유화를 배웠고, 29살에 졸업하면서 <자매>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 작품을 두고 당시 <매일신보>에서는 “조선에서 처음 나는 서양화가의 그림”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고희동은 1915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의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5년 과정을 졸업하고 돌아와 유화 활동을 함으로써, 한국에 서양식 유화를 신미술로 정착시킨 선구자였다. 그는 곧 새로운 양화 기법의 시대적 개척자였다.”(159쪽)
4. 그 밖에 여러 가지 이야기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한국 최초로 양화 부부가 탄생한 것도 밝혀주고 있는데, 바로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 이야기가 그것이다. 또한 서울에서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다 순국한 김상옥 의사를 직접 지켜봤던 구본웅이, 나라를 되찾은 훗날 그 옛날 그 처참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펜 하나로 그려낸 펜화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리고 1916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유학생이던 김관호가 졸업식 때 제출한 '해질녘'이 한국 최초의 나체화라는 이야기, 1893년 5월부터 10월까지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 때 우리 나라에서는 우리 음악 문화를 알릴 10명의 악사와 함께 83개의 물품을 가지고 갔고, 그리고 “조선식 가옥을 세우고 기와도 입힌 모양”으로 된 ‘조선관’도 세웠다는, 그야말로 우리 나라 근대 미술사와 관련된 그 모든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밝혀주고 있다.
모름지기 예술가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 역사 속에 길이 남게 된다. 작품이 없다면 분명 그 예술가도 그리고 그 예술가와 작품을 둘러싼 역사도 없을 것이다. 문학작품이야 조금은 꾸밀 수 있다지만 그림 작품은 꾸며낼 수도 없는 일이니, 그 역사성은 더욱 진지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뜻에서 본다면 숨어 있는 작품과 그 예술가를 찾아, 그 역사성과 함께 모든 사실들을 밝혀가며 이야기를 엮어 낸 이구열씨야말로 정말로 대단한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 근대 미술사에서 시사만화라든지, 펜화라든지, 유화라든지, 나체화라든지 그 모든 작품들의 시작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참으로 대단한 결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 한국 근대미술사학의 개척자 이구열의 화단 비화
이구열 지음,
돌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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