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파격 판결'은 정치 보복성?

신병주·노대환의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에 담긴 비화들

등록 2005.07.26 01:02수정 2005.07.2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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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공찬전>이 금서가 된 까닭

<전우치전>과 <홍길동전>, 그리고 <설공찬전>은 조선시대 금서(禁書)와도 같았다. 금서란 말 그대로 나라에서 책을 읽지 못하게 한 것인데, 나라에 대항하거나 백성을 소란케 하거나 민심을 어지럽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금지시켰던 것이다.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겉그림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겉그림돌베개
사실 <전우치전>과 <홍길동전>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가 흥미를 끄는 것은, 신출 기묘한 도술을 발휘해 탐관오리들을 벌하고,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그야말로 민중들이 품고 있던 염원을 이뤄줬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우치전>은 그 끝이 스스로 산 속에 들어가 숨어 지내는데 반해, <홍길동전>은 율도국에 건너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그럼 <설공찬전>은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금서에 포함되었고, 조선시대 최고 필화(筆禍)사건에까지 연루된 것일까. 사실 <설공찬전>은 채수(蔡壽, 1449-1515)라는 학자가 쓴 것인데, '설공찬'에게 있는 혼령이 '설공침'에게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작은 이야기들과 저승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은 그 당시 흔치 않던 귀신을 끌어들여 나라를 어지럽게 할 뿐만 아니라, 윤회사상을 끌어들여 임금도 지옥에 들어갈 수 있고, 또 가난한 백성도 훗날 더 좋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지위도 향상시켜주는, 그야말로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금서가 된 것이다.

신병주·노대환 교수가 쓴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따지고 보면 <전우치전> <홍길동전>, 그리고 <설공찬전>은 그 당시 현실세계, 현실 정치와는 다른 세계를 꿈꾼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신통력과 도술을 어떻게 사실처럼 이야기할 수 있으며, 신분차별에 대한 이야기도 어떻게 서슴없이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들이 결코 허무맹랑하거나 무협지나 만화 같은 인상만을 풍기는 것은 아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꾸며서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있음직한 일들과 실존 인물들을 떠올리며 쓴 것들이다. 그래서 그 당시 부조리한 사회를 꼬집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뜻에서 그런 소설을 썼던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그 시대 소설이 지니고 있는 실제 역사와 허구적인 장면 뒤에 숨어 있는 실체, 그리고 그 소설 속에 숨어 있는 정치와 사회의식 등을 꼼꼼하게 밝혀준 책이 있다. 신병주·노대환 교수가 쓴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돌베개·2005)이 그것이다.


"<설공찬전>이 금서로 규정된 데는 무엇보다 당시 조선의 시대적·사상적 분위기, 그리고 채수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가 깊다. 채수가 <설공찬전>을 쓴 16세기는 조선 사회의 지도 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이 중앙 정계뿐만 아니라 지방 곳곳에까지 침투한 시기였다. 따라서 15세기까지 어느 정도 용인되었던 불교사상은 완전히 배척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불교의 윤회화복 사상을 주요 소재로 한 <설공찬전>은 매우 위험스런 소설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44쪽)

<은애전> 속에 담긴 국왕 정조의 보복성 판결

이 책에는 그래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가상역사소설인 <임진록>, 성춘향과 이몽룡 간에 얽힌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춘향전>, 배씨 성을 가진 비장(裨將)이 제주도에 도착하여 혹독한 신참례(新參禮)를 치르면서까지 기생 애랑이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배비장전>을 포함해, 모두 스무 편에 달하는 고전소설과 그 이야기를 둘러싼 숨은 실체와 정치·경제·사상·생활사 등을 엿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를테면 <춘향전>을 보통 신분을 초월한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나, 한 남자를 향한 한 여인의 절개, 또는 부정한 탐관오리를 응징한다는 주제로만 읽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을 뛰어넘고 있다.

즉, 그 당시 숨어 있는 남녀간의 혼인적령기는 몇 세부터 몇 세까지인지, 이몽룡이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했다는데 과연 그 당시 인재등용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아무리 암행어사로 뽑혔다하더라도 당시 연고지에는 파견하지 않았던 상피제(相避制)가 있었는데, 이몽룡은 그 제도를 어떻게 뚫고서 남원까지 내려갈 수 있었는지 등 여러 가지 재미난 사회상을 밝혀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상피제를 엄격히 적용하여 암행어사를 자신의 연고지에 파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연고지역에 파견을 나갈 경우 안면 있는 벼슬아치들의 청탁으로 공정한 암행 업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상피제를 감안하면 이 도령이 남원으로 파견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추첨에 의한다할지라도 남원에 갈 수 있는 확률은 400분의 1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춘향전>의 작자는 춘향이 고통 받는 남원으로 암행어사 이 도령을 파견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31쪽)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은애전>(銀愛傳)이 아닐까 싶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은애전>은, 정조 14년(1790)에 전라도 강진 지방에 살고 있는 '김은애'라는 여인이 저지른 살인 사건을 둘러싼 판결 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김은애라는 아낙이 혼인 적령기였던 바 이웃에 사는 노파가 그걸 이용하여 돈과 먹을거리를 뜯어내려고 하는데, 그게 잘못되자 노파는 이미 다른 사람과 혼인까지 한 그녀를 무려 2년 동안이나 못살게 하자, 급기야 그녀가 부엌칼로 노파를 찔러 죽였는데, 그 사건을 심의한 국왕 정조는 그 당시 시류와는 달리 그녀를 무죄로 판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왜 그토록 정조가 파격적인 판결을 내렸는지 그 속내를 꼼꼼히 따져 묻고 있는데, 놀랍게도 죽은 사도 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으로서 그 같은 판결들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책에는 김은애 살인 사건뿐만 아니라 김계손 형제와 관련된 복수 살인극도 곁들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역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 세자를 생각하면서 내린 정조의 효심과 그 보복성 판결로 평가하고 있다.

"김계손 형제의 복수 사건을 심리할 때 정조는 김화리봉과 김응채가 왜 다투었는가 하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자식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였을 뿐이다. 정조는 김계손 형제 사건을 비롯해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아버지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보복을 한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꼈는지도 모른다."(296쪽)

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 개정증보판

신병주.노대환 지음,
돌베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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