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쓰라고 세운 학교 아닙니다"

평택 대추리 주민들, '미군기지 이전' 대추초등학교에 도서관 열어

등록 2005.08.17 22:24수정 2005.08.1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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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솔부엉이 마을도서관' 개관식에서 색줄을 끊은 주민들

'솔부엉이 마을도서관' 개관식에서 색줄을 끊은 주민들 ⓒ 문만식

"오늘 우리는 비록 죽음이 저 앞에 있더라도 후대를 위해 감나무를 접붙이는 마음으로 대추마을 도서관을 여는 것입니다.…대추초등학교를 평화로운 교육터로, 쉼터로 계속 가꾸어나갈 것입니다."

8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정태화(71) 노인회장은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이 날은 주민들이 '솔부엉이'라 이름붙인 도서관을 여는 날이었다.

a 축가 부르는 도두2리 어린이들

축가 부르는 도두2리 어린이들 ⓒ 문만식

대추리 주민들이 폐교인 대추초등학교에 도서관을 열기로 한 것은 지난 5일. 학교가 국방부에 매각되고 국방부 관계자에게서 지난 1일 "건물을 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상황실로, 운동장을 전투경찰 주차장으로 이용하겠다"는 발언이 나온 뒤 일이다.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을 전해들은 주민들은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추초등학교에 4남매를 보낸 김인순(71)씨는 "아이들이 겨울에 통학할 때 장화를 못 사줘 진흙에 빠진 발목이 얼어 울고 했었는데 학교가 선다고 해서 빚 얻어서 쌀 한 말을 냈다"며 "아이들도 많고 해서 정말 좋아했었는데 거기에 전경차 세워놓는단 말을 들으니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a 도서관 첫 방문자들

도서관 첫 방문자들 ⓒ 문만식

대추초등학교가 설립된 1969년 당시 '학부형 운영위원회' 총무를 지낸 방승률(71)씨는 "운동회 때 상품까지 경비 일체를 우리가 다 부담했고, 우마차에 모래를 실어 날라 운동장을 다졌다"고 회상하면서 "미군 쓰라고 세운 학교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그 어려운 시절에 주민들이 합심해서 뚫고나온 것을 생각하면 아득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대추초등학교 2회 졸업생이면서 현재 대추리 이장을 맡고 있는 김지태(47)씨는 "비록 폐교라지만 많은 사람들이 밟고 살아온 흔적이 운동장에는 항상 지워지지 않았다"면서 "국방부는 자기 소유라고 하겠지만 주민들 정서는 그 반대"라고 말했다. 그는 또 "배움터를 이어가고자 하는 주민들의 뜻을 받들어 미군기지 확장을 꼭 막아내겠다"고 덧붙였다.

a 뒤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회~6회 졸업생. 가운데 뒤가 김지태 이장.

뒤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회~6회 졸업생. 가운데 뒤가 김지태 이장. ⓒ 문만식

이날 개관한 '솔부엉이' 도서관은 교실 한 칸 크기에 1100여 권의 책을 갖추고 있다. 도서관이 개관한다는 소식이 처음 전해진 8월 10일부터 16일까지 1주일 동안 기증된 책들이다. '솔부엉이'라는 이름에는 이 마을 참나무 숲에 서식하는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가족에 대한 주민들의 '동병상련'의 애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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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부엉이' 마을도서관을 열며
대추리 주민들 성명 전문..."끝까지 고향 지킬 것"

우리는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정부와 미국이 대북 폭격을 위한 미군기지를 신설하면서 옛 대추리에서 강제로 쫓겨난 전쟁 난민들입니다. 집과 마을, 농토와 임야를 보상 한 푼 없이 모두 미군기지에 빼앗겼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정든 고향을 꿈에 그리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과 고통 속에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실향의 아픔을 딛고 맨손으로 땅을 일궈 지금의 대추리에 정착했습니다. 비록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아이들에게까지 못 배운 서러움을 물려줄 수 없었기에 온 주민이 소망하여 학교를 세웠습니다. 보릿고개를 겪는 참으로 배고픈 상황에서 모두가 형편껏 쌀을 거둬 학교 부지를 사들였습니다.

우리는 내 집 정원을 가꾸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애정을 갖고 학교를 가꾸어왔습니다. 교육이라는 참으로 거룩한 취지가 있었기에 우마차를 끌고 모래를 퍼 나르는 2년간의 힘든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만,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 어려운 시절에 우리가 어떻게 그 과정을 뚫고나갔던가" 아득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정든 고향에서 한 번 쫓겨나 온갖 고통을 당하며 살아온 것도 억울하고,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또 다시 나가라고 하는 것도 참을 수 없이 원통한 실정입니다. 더 이상 짐짝처럼 내동댕이쳐지는 삶을 살 수 없기에,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고 고향땅을 지키며, 나 자신의 삶을 살겠노라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너무나 기가 막힌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땀과 혼이 깃든 대추 초등학교를 정부기관들이 팔아치우고 사들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만 살아온 우리들을 마치 축사의 병든 가축들마냥 가두어두고 감시하고 함부로 손찌검하는 것도 모자랐던 것일까요? 이제는 공공연히, 저 교실에 주한미군 이전 상황실을 설치하고, 이 운동장에 전투경찰 캠프를 설치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나라에 베푼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지금 정부는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세운 본래 정신을 꿋꿋이 이어갈 것입니다. 소중한 교육의 터전을 폭력과 분쟁, 전쟁의 전초기지로 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곳 대추 초등학교를 평화로운 교육터로, 쉼터로 계속 가꾸어나갈 것입니다. 살기 좋은 마을을 꾸밀 것입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에 우리의 손때가 묻어있고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려는 세력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이고 정든 고향을 지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비록 죽음이 저 앞에 있더라도 후대를 위해 감나무를 접붙이는 마음으로 대추마을 도서관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내쫓는 데 대한 어떠한 보상, 지나간 희생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정부에 대한 미움을 벗어던지고,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후손을 위해 미군기지 확장을 반드시 막아낼 것입니다.

오늘 대추마을 도서관 '솔부엉이' 개관식에 직접 찾아주신 손님들과, 책과 교육자료를 보내주신 분들, 멀리서 지지와 격려를 보내주시는 모든 시민들께 감사드립니다.

2005년 8월 17일

대추리 주민회

덧붙이는 글 | 책 보낼 곳: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0-12 '솔부엉이' 도서관, 연락처 / 평화바람(031-691-2056)

덧붙이는 글 책 보낼 곳: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160-12 '솔부엉이' 도서관, 연락처 / 평화바람(031-691-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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