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쏭칭링꾸쥐에 있는 쑨원과 쏭칭링의 결혼 사진김대오
1915년 10월 25일, 중국과 타이완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쑨원(孫文)은 당시 49살이었는데 여비서로 일 하다던 22살의 쏭칭링(宋慶齡)과 일본 도쿄에서 결혼했다. 쑨원의 혁명자금을 지원했던 쏭루야오(宋如耀)가 바로 쏭칭링의 아버지였으니 그녀는 바로 아버지의 친구와 결혼한 셈이다.
1927년, 40살의 장제스(蔣介石)는 쏭칭링의 동생 30살의 쏭메이링(宋美齡)과 네 번째로 결혼했다. 1928년, 징강산(井岡山) 시절 35살의 마오쩌둥(毛澤東)은 당시 19살이던 혁명투사 허쯔전(賀子珍)과 세 번째로 결혼했으며 1976년 9월 9일, 83세 마오쩌둥의 임종을 지킨 것은 32살의 세 번째 애인 장위펑(張玉鳳)이었다.
1928년, 중국현대문학 최고의 작가인 47살의 루쉰(魯迅)은 17살 연하의 제자 쉬광핑(許廣平)과 두 번째로 결혼했다.
1944년, 중국현대문학 최고의 여작가로 뽑히는 당시 23살의 장아이링(張愛玲)은 15살 연상인 괴뢰정부의 관리로 중국의 매국노로 불리는 후란청(胡蘭成)과 결혼했으며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30살 연상인 미국 작가 페르디난드 레이어(Ferdinand Reyher)와 두 번째 결혼을 하기도 했다.
1943년 발표된 중국 '인민문학'의 대표작가 자오수리(趙樹理)의 소설 <샤오얼헤이의 결혼(小二黑的結婚)>에 보면 결혼은 계급투쟁과 혁명의 부산물처럼 묘사되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 등 무산계급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사례도 많았다.
그런데 개혁 개방 이후 자본주의적 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중국인들의 결혼관에 많은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계급적 가치로 저울질되던 결혼이 이제는 경제적인 가치로 선택되는 느낌이 강하다. 중국인들은 비교적 개방적인 결혼관을 가진 것으로 보이며 결혼을 부와 권력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대체로 너그럽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왕니엔리엔(忘年戀, 나이를 잊은 사랑)’이 자칫 ‘왕리엔훈(忘戀婚, 사랑을 잊은 결혼)’으로 변질되지 않을까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하게 존재한다.
덧붙이는 글 | [데일리차이나]는 그날 그날의 중국 근현대 소사(小史)를 전하며 중국 역사 속의 오늘의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국정넷포터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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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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