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무죄'에 침묵하는 정부는 '유죄'입니다

[공개편지] 천정배 법무장관께... 다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며

등록 2005.11.09 14:51수정 2005.11.09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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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법무부 장관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 6월 10일 동두천에서 우유 배달을 하던 고 김명자씨가 미군트럭에 깔려 숨진 사건과 관련, 비상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일하고 있는 이소희라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죄라니요...

얼마 전 미군 <성조지>를 통해 미군당국이 이번 사건과 관련, 지휘관들에 대해서만 서면 견책을 내리고, 운전병은 재판도 없이 무죄 처분과 함께 '운전교육' 명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접하고 나니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무죄라니요…. 그것도 재판도 하지 않고 무죄 처분을 내린 것이 말이나 됩니까.

사고 직후 부시 미국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 이번 사건에 관해 노무현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했습니다. 주한미군 사령관도 직접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고, 거듭 사과의 뜻을 밝혔습니다. 언론은 이례적인 미군당국의 모습을 연일 크게 보도하였고, 이번엔 여중생 사건과는 달리 잘 해결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사건은 차츰 국민들의 관심 속에 멀어져 갔습니다. 그것이 미군당국의 숨겨진 계산이었다면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 셈입니다.

a 11월 1일 용산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열린 '미군트럭 압사사건 면죄부 주한미군 규탄' 기자회견

11월 1일 용산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열린 '미군트럭 압사사건 면죄부 주한미군 규탄' 기자회견 ⓒ 미군트럭압사비대위

이 나라가 주권국가입니까?

이후 진행 과정에서 한미 당국은 여중생 사건 때와는 달리 일절 공식적인 언급을 자제하며 사건이 조용히 묻혀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수사 결과는 물론, 우리나라가 사상 두 번째로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을 때, 이후 또 다시 미군측의 거부로 좌절됐을 때에도, 한미 당국 어디서도 공식적인 보도자료 한번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미측 처분 결과를 우연히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하게 된 것이나, 그에 관해 지금까지 정부당국이 아무런 공식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 것 역시 특별히 새로울 건 없겠지요. 정부당국마저 이번 미측 처분 결과에 대해 따로 통보받은 것이 없고,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소식을 접했다는 대목에서는 서글픔마저 밀려옵니다.

자국민이 죽었는데, 가해자에 대해 재판권도 행사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주권국가입니까.


사상 두 번째로 미군당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지만 거부당한 뒤 그 결과조차 따로 통보받지 못했다면 이것이 주권국가입니까.

뒤늦게 미군당국이 재판조차 열지 않고 '무죄' 처분을 내린 것을 알고도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 주권국가입니까.

새삼 미국 앞에서는 너무도 약한 나머지 굴욕적이기까지 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공무 중이면 사람을 죽여도 무죄"

왜 정부당국은 지금껏 짤막한 입장 하나 내놓지 못하고 침묵하는 것입니까.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유감을 표명하고도 재판도 없이 무죄 처분을 내림으로써 결국 미측의 거짓 쇼에 농락당한 건 노 대통령 자신과 우리 국민임을 모르십니까.

그 생각을 하면 자존심이 상해 참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나라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일국의 대통령을 상대로 말장난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점에서 이번 일은 사법 주권의 문제이자 국가적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냥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무죄 처분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거니와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입니다. 여중생 사건 무죄 평결에 이어 또 다시 무죄 처분으로 끝난다면, 미군들에게 "공무 중이면 사람을 죽여도 무죄"라는 인식이 더욱 굳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주둔한다는 미군이 임무 수행 중에 오히려 우리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일방적인 무죄 처분을 받는 모순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공무 중이라면 사람을 죽여도 되는 겁니까? 공무증명서가 살인 면허라도 된단 말입니까?

이러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제2, 제3의 여중생 사건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정부가 이제라도 자기 자리로 돌아와 제 역할을 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솔직히 8일 법무부에서 비대위에 보낸 회신을 받고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이번 미측 처분에 대한 법무부의 입장과 대응책을 묻는 공문에 "법무부는 이미 이번 사건에 대해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하는 등 SOFA 규정에 따라 처리했다"는 요지의 회신이었습니다. "법무부는 이미 할 만큼 다 했다"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재판권 포기 요청을 보낸 것으로 법무부가 할 일은 끝났다는 것인데, 이것이 과연 국민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법무부가 할 소리인지 씁쓸하기만 합니다. 답변을 하기 전에 다만 몇 분간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다면 그런 식의 회신은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답을 두고 고심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만일 가까운 내 가족이 이러한 피해를 당했다 해도 딱 잘라서 "더 이상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정부당국의 무책임한 태도가 결국 이 같은 비상식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닌지 겸허한 자기반성도 함께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군당국이 사실상 재판권을 행사하지 않고 행정 처분으로 마무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법정에서 가해 미군들을 처벌하고, 사건의 진상이라도 명확히 규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수사 과정에서부터 많은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재판은 사건의 사실 관계를 파헤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회의적인 건 사실입니다. 그동안 이러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례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지, 미리부터 안 될 거라 단언하고 포기할 순 없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요. 진심으로 구하고, 찾다 보면 방법이 전혀 없겠습니까. 적어도 그 과정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찾았다는 건, 곧 구체적인 대책을 내올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광화문에서 촛불을 듭니다

a 광화문에서 1인 촛불시위에 나선 비대위 강홍구 대표.

광화문에서 1인 촛불시위에 나선 비대위 강홍구 대표. ⓒ 미군트럭압사비대위

비대위에서는 지난 1일부터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이번 미측 처분을 규탄하는 1인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3년 전, 광화문 일대를 수만의 촛불로 뜨겁게 달구던 여중생 투쟁을 기억하며 이번만큼은 '제2의 여중생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법무부에 오는 14일까지 이번 미측 처분과 관련 법무부의 공식 입장과 대응책을 묻고, 법무부장관님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공문을 재차 발송하였습니다. 직접 얼굴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서면으로라도 법무부의 입장을 밝혀달라는 저희의 요구가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니겠지요.

정부의 침묵은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사건을 은폐,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유죄'입니다. 이번 회신에서는 정부의 고뇌를 읽을 수 있길 바라며, 긴 글을 마칩니다.

2005. 11. 9.

덧붙이는 글 | 이번 사건만큼은 '제2의 여중생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비대위에서는 11일까지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오후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타 자세한 소식은 비대위 홈페이지(http://usacrime.or.kr/truck)를 참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번 사건만큼은 '제2의 여중생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비대위에서는 11일까지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오후 6시부터 두 시간 동안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기타 자세한 소식은 비대위 홈페이지(http://usacrime.or.kr/truck)를 참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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