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판 고수'에서 '컴퓨터 고수'가 되다

[정보격차를 줄이자 ②] 새터민의 '디지털 라이프' 적응기

등록 2005.12.05 11:18수정 2005.12.0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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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물결 속에서 정보 격차는 새로운 사회적 불평등과 불안 요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연령별·소득별·지역별 정보 격차는 쉽게 줄어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보통신(IT) 강국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정보 격차 해소에 이바지해야 할 책임과 과제가 있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국·내외 정보 격차의 실상과 해결 방안 등에 대한 기획 연재 기사를 게재합니다. 두 번째로 북한 출신 새터민의 '디지털 라이프' 적응기를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a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한빛종합사회복지관에서 정보화 교육을 받고 있는 새터민들.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한빛종합사회복지관에서 정보화 교육을 받고 있는 새터민들. ⓒ 오마이뉴스 이승훈

서울 양천구에 있는 한빛종합사회복지관에 마련된 컴퓨터 교육실. 늦은 저녁시간 찾아갔는데도 새터민(북한이탈주민)들의 컴퓨터 정복에 대한 열기만은 뜨거웠다.

3시간 동안 계속된 수업 시간 동안 이들은 엑셀, 파워포인트 등의 활용법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실습에 열중했다. 이곳에서 만난 새터민들은 자격증을 취득을 목표로한 전문 과정을 이수하는 터라 이메일을 확인하고 인터넷 메신저로 채팅을 하는 것 따위는 이제 '식은죽 먹기'가 된 듯했다.

컴퓨터와 관련된 지식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이들에게 가장 고마운 존재인 '선생님'은 허금이(44)씨로 그도 새터민이다. 고향이 함경북도인 허씨는 2001년 10월 북한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지금은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4개나 가진 '고수'가 돼 새터민과 장애인 등의 정보화 교육을 돕고 있지만 처음 한국 땅에 발을 내려놓을 때만해도 그는 '컴맹' 신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북에서는 대학을 나와 기업체 회계관련 일을 했지만 업무처리는 컴퓨터 대신 주판으로 해결했다. 허씨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해본 것은 남쪽에 와서가 처음이었다. 대학에서 이루어진 컴퓨터 교육은 대부분 이론 배우기로만 끝이났고 실제로 컴퓨터를 대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특히 인터넷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북에 있을 때 업무처리는 주판으로

허씨는 "하나원(새터민 적응 교육 시설)에 들어가 정보화 교육을 받으면서 컴퓨터 자판을 처음 만져봤는데 너무 신기했다"며 "특히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원에서의 정보화 교육은 그정도에서 그쳤다. 컴퓨터 타자치기와 이메일 등 간단한 인터넷 사용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북에서처럼 회계 관련 일자리를 찾고 싶었던 허씨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는 하나원에서 나온 후, 북에서는 주판만 잘 다루면 되지만 남에서는 컴퓨터 없이는 일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바로 컴퓨터 학원에 등록했다.

컴퓨터를 알아야 된다는 생각에 밤낮으로 매달린 결과 1년 만에 워드프로세서 1급, 인터넷정보검색사 2급, 전산회계운용사, 컴퓨터활용능력 2급 등 4개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또 자신의 홈페이지도 직접 제작하는 등 정보화의 세례를 충분히 받은 웬만한 남쪽 사람들보다 뛰어난 컴퓨터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취업에는 실패했지만 허씨는 실망하지 않고 한국정보문화진흥원(KADO)에서 정보화 강사 양성교육을 이수한 끝에 '선생님'의 길로 들어섰다. 2년여 전부터는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새터민을 비롯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정보화 교육을 맡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정보화유공자상을 받기도 했다. 허씨는 "새터민 동료들이 남쪽에서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기술을 깨우치는데 도우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컴퓨터 선생님 정보화유공자상 받다

2년여 만에 컴퓨터 도사가 된 허씨지만 과정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허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영어 일색인 생소한 컴퓨터 용어였다. 북에서 이론으로나마 배웠던 컴퓨터 용어는 남쪽과는 전혀 달랐고 또 대부분 영어에다 약어로 되어있어 마치 암호와도 같았던 것이다.

허 씨는 "처음에는 컴퓨터도 생소한 데다 책에 쓰여진 용어들은 아무리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 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며 "지금 내가 교육을 해봐도 새터민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용어 이해"라고 말했다. 또 "새터민들이 처음에는 컴퓨터가 신기하고 인터넷을 써보는 것이 재밌어서 교육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정보화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도 대부분 용어문제 때문"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실제 새터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남북간 정보격차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용어문제가 꼽혔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조사 발표한 '새터민 정보화 실태조사'에서 새터민들의 정보통신 용어의 이해도는 19.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메일, 전자상거래 등 정보통신 관련 단어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조사한 것인데 단어 10개 중 8개를 모르는 것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새터민 700명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 결과, 북한에서 인터넷을 사용한 경험은 전체의 1.9%, 컴퓨터 사용경험도 7.7%에 불과했다. 컴퓨터를 이론으로나마 배운 경험이 있는 새터민의 비율도 12.1%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남북한 정보통신 용어는 동일한 경우는 42%에 그쳤고 58%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설사 북한에서 정보화 교육을 충실히 받았다하더라도 남쪽에 와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새터민 서 아무개(29)씨는 "북쪽에서도 2002년부터 학교에 컴퓨터 보급도 늘리는 등 교육을 강조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새터민들이 남쪽에 와서 어려움을 겪은 것은 용어가 다른 것 보다 아예 전혀 정보통신쪽을 모르는 게 더 큰 이유"라고 말했다.

서씨는 "젊은 사람들은 그나마 낫지만 30대와 40대를 넘긴 분들은 하나원을 나와 생업에 뛰어들다 보면 어렵고 힘든 정보기술 습득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단순 노무직이 아닌 이상 컴퓨터와 인터넷 활용이 기본인데 이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취업이 안돼 경제적 취약계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새터민들 정보화 교육 외면은 필요성 몰라서

때문에 새터민들의 정보격차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정보화 교육 자체보다도 이것을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부여가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새터민들 초기 적응교육에서 단순한 컴퓨터 사용법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지식이 남쪽에서 갖는 중요성과 필요성을 좀 더 설득력있게 제시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원에서 나온 이후 각종 사회복지시설이나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정보화 교육에 새터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허금이씨는 "남쪽에서 컴맹은 한글을 모르는 것과 같이 취직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불편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닌데 이러한 점을 새터민 동료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새터민들의 정보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은 비교적 잘 돼 있는데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자신도 수업시간에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정보화에 뒤처지지 말아야할 필요성이라고 덧붙였다.

새터민들은 또 컴퓨터 등 정보화 기기 구입에 대한 지원 필요성도 거론했다. 현재 한 사회복지시설의 정보화교육에 참여하고 있는 김 아무개(39)씨는 "컴퓨터와 인터넷은 자주 써봐야 잊어버리지 않고 능숙하게 되는데 남한에 온지 얼마 안된 새터민들에게는 컴퓨터 구입은 비용도 만만치 않고 어떤 제품을 구입해야하는 지 알기 쉽지 않다"며 "교육받은 것을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게 이에 대한 교육과 지원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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