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게이트볼학교 3학년

게이트볼에 빠진 아버지,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등록 2006.09.23 19:50수정 2006.09.24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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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엎어진 거 하고 보리 엎어진 거는 그래도 묵을 끼 있다..."


여든이 가까운 친정 아버지랑 큰 고모부님을 모시고 강화도를 한 바퀴 도는 길이었어요. 무슨 말씀 끝에 고모부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늙은이 엎어진 거하고 보리 엎어진 거는 그래도 묵을 끼 있다'고 말이에요.

"고모부님예, 그기 무슨 말입니꺼? 무슨 말인데요?"
"아, 늙은이 엎어지마 상가집에 묵을 끼 있고 보리 엎어진 거는 나락 엎어진 거보다는 묵을 끼 있다, 그 소리제."
"아~ 그 말이구나. 난 또. 호호호."

보리는 바람에 넘어져도 타작하면 거둘 게 있지만 벼는 거둘 게 없답니다. 올해는 비바람이 그다지 불지 않아서 벼농사가 실농이 안 되어서 다행이라며 그러시네요. 어른들이랑 있으면 참 배울 게 많습니다. 순간순간 스쳐가는 말 속에 삶의 진리가 숨어 있기도 하고 넉넉한 인생 경륜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고모부님을 모시고 강화도를 한 바퀴 일주했습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광장에서 찍었습니다.
아버지와 큰고모부님을 모시고 강화도를 한 바퀴 일주했습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광장에서 찍었습니다.이승숙
우리 친정 아버지는 서울 올라오시면 딸네 집보다는 아버지한테는 여동생이 되는 우리 친정 고모집에 주로 계십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냥 한 이틀 정도만 머무시고 고모 집에서 일 주일 이상 지내십니다. 딸네 집은 사위도 딸도 다 바쁘게 움직이니까 아무래도 불편하신가 봐요.

하지만 고모집은 고모부랑 고모 두 분만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 계시기에는 우리집보다 더 편하실 거예요. 우리 아버지 말씀으로는 "생질부가 있으면 어렵겠지만 너거 고모 내외만 있으이까 아무래도 편타 아이가" 그러시더군요.


아버지랑 고모부는 경로우대증이 있으니 어디를 가도 교통비도 안 들고 관람료도 안 들고 그리고 복지관 같은 데선 점심 식사도 한 끼에 천 원 밖에 안 한답니다. 그래서 두 분이 나란히 아침만 잡수시면 밖으로 나오셔서 놀러 다니신다 그러네요.

작년 가을께에도 아버지는 서울 나들이를 하셨는데 우리 집에 오시기 전에 고모집에서 이틀을 지내셨어요. 그런데 글쎄 그 이틀 동안에 게이트볼 구장을 다섯 군데나 놀러 다니셨답니다.


아버지랑 고모부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계세요. 바로 게이트볼입니다. 게이트볼을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째 되시는데, 그러니 자기들은 이제 3학년이라며 박장대소합니다. 두 분은 자리에 앉기만 하면 게이트볼 이야기를 합니다.

2006년 9월 23일 강화군 길상면 강남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게이트볼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006년 9월 23일 강화군 길상면 강남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게이트볼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이승숙
재작년 봄에 친정에 갔더니 사진 하나가 벽에 붙어 있더군요. 그래 뭔가 싶어 봤더니 게이트볼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사진이었어요. 청도군 게이트볼 대회에서 영광의 우승을 한 사진이었어요. 우승기를 옆에 자랑스럽게 세워놓고 회원들이 동네 복지회관 앞 계단에 앉아서 포즈를 취했더군요. 가만 보니 작은집 아지매도 있고 아재들도 있고 모두 다 아는 어른들이라서 참 정겨웠습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가 내 나이일 때 그 때 그 어른들 다들 참 풍채도 좋고 근력도 좋았는데 지금 보니 다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어서 마음이 조금 아팠습니다. 그래도 즐겁게, 활기차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아버지 말씀으로는 게이트볼을 처음 시작할 때는 회원이 20명이 훨씬 넘었답니다. 그러나 지금은 16명 정도만 남아서 열심히 치신답니다. 가만 보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중간에 탈락됐다고 하더군요. 모든 운동이 다 그렇겠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 없이는 운동을 할 수 없겠지요. 규칙적인 생활이 우선 되어야 운동을 할 수 있나 봐요.

2003년 4월 29일에 있었던 경북 청도군 게이트볼 경기에서 매전면지회가 우승했습니다.
2003년 4월 29일에 있었던 경북 청도군 게이트볼 경기에서 매전면지회가 우승했습니다.이승숙
작년 가을, 비가 온 뒤에 엎어져 있는 벼들을 보면서 노인네 엎어지면 먹을 게 있지만 벼 엎어지면 건질 게 하나도 없다며 농부들 걱정을 하시더군요. 벼가 엎어져 있어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라 여기며 대충 지나쳐 다니던 내가 돌아보였습니다. 평생을 땅에 기대어서 사셨던 우리 아버지는 길을 걷다가도 농작물이 길에 나와 있으면 그거 안 밟고 다시 밭으로 옮겨 넣어주십니다.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오신 우리 아버지는 그러나 지금은 병환 중이십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치시던 게이트볼도 못 치고 동네를 한 바퀴씩 돌던 아침 산책도 못 하십니다.

어디가 잘못 되었는지 걸으면 다리가 너무 아프시답니다. 그래서 신경외과로 한의원으로 치료 받으러 다니십니다. 볏가마니를 번쩍번쩍 들어올리시던 그 기운은 다 사그라지고 지금은 겨울나무처럼 앙상하시기만 합니다.

아버지가 다시 게이트볼을 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게이트볼 학년이 5학년, 6학년을 넘어서 대학교까지 졸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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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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